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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Adam Lee

파라샤트 바이크라 5783 '가까이 다가가기'

샬롬, 이번 주에 우리는 히브리어로 ‘그가 부르셨다’라는 의미를 지닌 토라의 세 번째 책, 바이크라(레위기)를 시작합니다.

파라샤트 바이크라는 토라의 ‘역사적 흐름’이라는 맥락에서 그 내러티브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의 끝이 곧바로 바미드바르(민수기)로 이어져야 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토라는 ‘역사책’이 아니죠.


바이크라는 기록 토라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데, 베레쉬트와 슈모트는 앞 쪽에, 그리고 바미드바르와 드바림은 뒤 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 현인들은 바이크라를 토라의 심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별칭은 모셰 5경 중에서 그 책의 위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 책의 주제가 ‘기초적’이라는 내용에 대한 엄청난 의미를 암시하는 힌트가 되어줍니다. 말하자면 바로 하쉠의 마음 같은 것입니다.


이 책의 일부는 정결함과 거룩함의 문제를 다루며, 우리의 나쁜 선택이 어떻게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만들어 내어 사람과 하쉠 사이의 거리를 늘리는지를 강조하고, 개인이 자신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하여 신성한 빛으로 가득 찬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또한 이 책은’ 금지된 음식’과 ‘금지된 성관계’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불결함이 영혼 주위에 해롭고 전염성 있는 껍데기를 형성해 거룩의 빛을 차단하고 궁극적으로 사람을 하쉠으로부터 분리시킴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바이크라는 그렇게 슉히나(하쉠의 임재)를 떠나게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경고하며 ‘슉히나를 어떻게 여기에 붙들어 둘 수 있을까’라는 부제를 붙일 수 있는 거룩함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하론(아론)과 코헨(제사장)들은 성막의 거룩함을 지키는 자들이기에 바이크라에 나오는 대부분의 계명은 그들에게 주어졌는데, 그래서 이번 파라샤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성막’과 그 이후 거룩한 성전에서 드려질 제물에 대한 ‘신성한 섬김’이 됩니다.


여기에는 공부할 것이 너무 많고 배울 수 있는 세부 사항이 너무 많은데, 거룩한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에서의 섬김이 중단된 지 2000년이 지나면서 여러 세대를 거쳐 우리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점점 더 확장되는 시간과 함께, 유대 민족 고유의 이야기를 차용한 외국 문화와 사상은 우리에게 거룩한 성전과 그곳에서의 섬김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중요성을 파악하는 것에 대해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코헨들, 제물들, 향들, 슉히나...우리가 오늘날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던 신성한 영광들, 이 모든 것들은 너무나 초현실적인 것처럼 들리고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요소보다도 꿈처럼 들리기만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선 너무 많은 질문이 있는데, 아마도 토라의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더 할 것입니다.

현대인이 ‘제물의 역학’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에 대해선 유대 현인들 또한 고민했던 바였습니다.

하쉠께서 회막에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바는 제물에 대한 주제였고, 거룩한 성전도 아직 재건되지는 않았지만 토라는 영원하며 모든 세대의 모든 개인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슈모트의 결론 부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읽었습니다:

‘모셰가 회막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구름이 그 위에 머물고 있었고 하쉠의 영광이 미슈칸(성막)을 가득 채우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모셰가 성막을 세우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 후에 ‘하쉠의 영광’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데 그가 어떻게 들어가서 하쉠의 말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얘기인가요?

그 대답은 바이크라의 첫 번째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모셰를 부르셨다. 그리고 하쉠께서 회막에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하쉠께서 모셰를 불러 그를 성막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과 초청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요?

‘바이크라’는 실로 매우 깊은 단어입니다.

그것은 애정의 표현으로, ‘사랑의 말’입니다.


유대 현인들이 언급했듯, 여기에서 하쉠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올바른 행동’을 의미하는 ‘데렉흐 에레쯔’를 가르칩니다.

사람은 처음에 친구를 ‘부르기’ 전까지는 보통 말부터 바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에 대한 첫 번째 부르심은 베레쉬트(창세기) 3:9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때 하쉠께선 ‘알게 하는 나무’의 죄를 범한 인간과 소통하고자 하셨습니다.

‘하쉠 엘로킴께서 그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가 어디에 있느냐?”’

그분께선 분명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주 잘 알고 계셨죠.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을까요?

그 부르심에서 하쉠의 의도는 아담과 대화를 시작하여 그에게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한 ‘티쿤’이라는 무대를 마련해주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아담은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쉠의 부르심을 헛되이 흘리고 하쉠께 나아가기는커녕 더욱 멀어졌습니다.

자유 의지의 도전은 정확히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것이었고, ‘아담의 자녀’로서 그것은 또한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쉠과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것은 ‘사람의 선택’입니다.

하쉠께선 애정을 가지고 사람을 부르십니다.

성막/성전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에덴 정원을 고치는 작업입니다.

인간은 그 정원으로부터 추방되었지만, 어떤 면에서 인간의 선택은 또한 하쉠을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성막이 세워지고 하쉠께서 우리의 세상에 초대된 것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 가운데 모시기를 원하며, 그분의 계명을 따르기로 약속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쉠께선 마치 중간에 방해가 없었던 것처럼 다시 모셰를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이쓰라엘 아들들에게 말하여 너는 그들에게 일러야 한다. “너희 중에 하쉠께 제물을 가져오는 자(아담)는...”’

여기서 ‘아담’이라는 단어는 또한 첫 번째로 제물을 바친 사람이 자신의 죄, 즉 자기 선택의 중대함을 깨달아 하쉠께로 돌아가고자 했던 첫 사람 아담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제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코르반’은 ‘가까이 다가가다’라는 뜻의 ‘키르바’에서 유래 됐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영어 단어 ‘희생’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오역이며, 우리는 그 제물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의 친밀함을 성취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 행위가 어떻게 우리를 하쉠께로 더 가까이 데려간다는 것일까요?

동물이나 새를 제단에 바친다는 것이 사람의 영적인 균형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까?

‘속죄’의 개념이 사람을 하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우리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선택으로 인한 영적인 손상을 고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하쉠 앞에 드리는 제물이 그 과정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가요?

제물은 일종의 ‘뇌물’이나 ‘선물’인 걸까요? 아니면 ‘예금’ 같은 의미일까요?


하쉠, 영원하고 무한하며 몸이나 어떤 형태가 없고, 모든 것을 포함하며 인간을 위한 좋음만을 바라는 신, 모든 실재의 본질이신 하쉠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확실히 우리가 그분에게 동물을 바치는 것을 원하지는 않으십니다.

토라는 우리에게 하쉠께서 신경 쓰시는 것은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그 안에 모든 창조물을 담고 있는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그가 창조의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에 창조된 것은 그가 창조의 중심이고 모든 창조의 구현이며, 모든 창조를 통일과 완성으로 가져와 바로잡도록 돕는 능력을 부여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의 임무이고, 사람이 하쉠을 섬긴다는 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이 하쉠의 형태대로 창조되었다는 베레쉬트 1:27의 비밀입니다.


토라는 ‘죄’라는 것이 하쉠의 실재에 대한 우리의 초점을 깨뜨린 결과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모든 창조물을 포함하고 있기에 자신 안에 창조물을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역으로 파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일 수도 있는 ‘물질적 손해’ 외에도 부정적인 행동과 말, 심지어 부정적인 생각까지도 영적인 손해를 끼칩니다.

죄의 본질은 개인과 창조주 사이를 강제로 분리시키는 것이고, 제물은 벌어진 현실의 틈을 치유하고자 그들을 ‘재결합’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도 다시 보자면, 그럼 이 과정이 사람을 어떻게 하쉠께로 가까이 데려간다는 것일까요?

그 첫 단계는 우리 안에 있는 ‘신성’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바로잡기 위해 인간은 먼저 자신의 머리를 꼿꼿이 하고, 다시 중심을 잡아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기에 하쉠께선 사람에게 제물을 가져오라 명하셨고, 그 제물에는 깊은 성찰과 함께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개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사고와 후회와 자신의 동물적 본성을 넘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다짐 등을 말이죠.


죄는 ‘일시적인 광기’ 상태에 비유됩니다. 우리가 ‘인간’이기보다 ‘동물’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신성의 상실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신성한 영을 부여 받았죠.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은 하쉠의 친절하심과 인내, 동정심, 그리고 무엇보다 하쉠께서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는 바로 그 과정, 우리 안의 동물적 본성이 신성한 영의 측면으로 최고가 되어지는 내적인 정화, 그 자체가 하쉠께서 느끼는 제물의 기쁜 향기입니다.

하쉠께선 그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간성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하십니다.

의도가 없으면(온전치 않으면) 그 제공 자체는 가치가 없습니다.


생각이란 것은 매우 강력해서 잘못된 생각은 제물을 무효화 시킬 수 있는 반면, 올바른 생각은 속죄의 과정을 촉진시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제물에 대해서 겉보기에 ‘부정적인 방식’으로 말한 듯 보여지는 것에 대해선, 그 비판은 ‘분별없는 제물’ 때문이었습니다.


예샤야후(이사야) 1:11에서 하쉠께선 ‘너희의 많은 희생제물들이 왜 나에게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나는 숫양들의 올림제물들과 살찐 수송아지들의 기름으로 배불러서 수소들과 새끼 숫양들과 숫염소들의 피를 내가 기뻐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쉠께서 거절하신 것은 ‘제물’이 아니라,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가져온 제물을 얘기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보다 더 나쁜 것은 ‘필요한 것은 오직 제물을 가져온다는 것뿐이고 나는 이제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있겠지’라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제물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제물을 가져오는 촉매로 인해 시작된 ‘변화에 대한 내적 열망’과 그 헌신인 회개의 구성 요소는 하쉠께 소중하고도 유일한 부분입니다.

그에 대한 가장 깊은 계시는 토라의 제물이 단순한 ‘동물 도살’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가장 큰 존경심이라는 것으로, 바이크라는 하쉠의 친절하심, 연민, 그리고 자비에 대한 주요 ‘자료집’인데 이것은 바이크라의 제물 테마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유일한 하쉠의 이름이 ‘자비와 친절’이라는 신성한 속성을 나타내는 이름 ,YHVH라는 놀라운 사실로 강조됩니다.

이것은 성막/성전의 제물이 창조의 중심인 인간에 대한 하쉠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하쉠 자신이 신성한 섬김을 위한 이 지침서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그 특별한 표현을 통해 이러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막/성전 제사의 전체 개념의 기초는 이것이 인간을 돕기 위한 하쉠의 계획이며, 제사에 대한 하쉠의 모든 말씀은 인간에게 ‘자신의 신성한 영이라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세상을 채울 수 있도록 인간에게 쏟아내는 친절입니다.


성막/성전에서 동물을 바치는 것에 대한 전체적인 개념은 우리 밑의 카펫을 끌어내고 우리를 안락한 자리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항상, 또 항상, 토라는 인간이 창조의 중심이자 목적임을 강조합니다.

그의 안에 있는 동물적 본능을 따라는 것과 신성한 영혼의 부름(바이크라)을 따르는 것 사이에서 인간의 선택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며, 나머지 창조물은 인간의 위상에 걸맞게 노악흐(노아)의 시대처럼 부패와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든지 아니면 마쉬악흐(메시아) 시대의 모든 창조물들의 특징을 얘기하는 예샤야후 예언자의 ‘조화에 대한 이상’으로 구체화 된 것처럼 위로 들어올려져 완전해질 것입니다.

토라는 그렇게 우리가 인간성에 대한 민감함을 유지하도록 돕고자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인간이 직면하는 위험, 자신의 천박한 본능을 넘어선 인간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유지해야 하는 균형의 행동은 현실적이고 지속적이며, 그렇기에 바이크라는 토라의 핵심이 됩니다.

우리의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폭력적이고 생명에 대한 존중이 어느 때보다 적어졌기에 내면의 동물성에 길을 내주는 이 위험함은 현대인에게 더욱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물을 가져오는 것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심리학적 접근 방식은, 사람이 제단에 자신이 놓여있는 것처럼 제물에서 자신을 봐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제물이 그의 자리에 대체되었다는 것을 시각화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하는데, 본능적 경험은 그를 가장 깊은 감정과 접촉하게 해 그가 하쉠과 분리되는 상황을 초래한 바로 그 문제, 즉 ‘자만의 본성’에 직면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하쉠께서 모셰에게 주신 첫 번째 지시가 ‘아담 키 야크리브 미켐’, ‘너희 중에 하쉠께 제물을 가져오는 자는’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적절한’ 히브리어는 ‘아담 미켐 키 야크리브’여야 합니다.

본문의 히브리어 배열은 사실 ‘너희 중에 하쉠께 제물을 가져오는 자는’이 아니라 ‘사람이 너희 중에 제물을 가져올 때’로 되어 있는데, 이 특이한 구문은 당연히 깊은 교훈을 나타내 줍니다.


거룩한 네티보트 샬롬은 제물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그가 제공하는 ‘그 자신을 하쉠께 드리는 것’이라는 깊은 내면에서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즉 자만이 남아 있어서는 안되고, 모든 정욕과 함께 자기 주도적인 자만심의 감각이 없어야만 하며, ‘엔 오드 밀바도’, 오직 하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내 자신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무효화되고 비워진다는 깊은 명료함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는 하쉠께 온전히 바치는 행위로, 우리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을 그분에게 맡기고, 우리 자신을 비워서 그분의 빛으로 채워야 합니다.


자만의 특성은 모든 부정적인 속성의 뿌리이며, 사람을 하쉠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많은 죄의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하쉠에게 집착하는 것을 막죠.


사람의 정신을 다른 이들보다 인위적으로 높여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섬기기 위해 여기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그가 원할 때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는 것은 부풀려진 자만심입니다.

가장 깊은 진실은, 성막/성전 제사의 전체적 목적이 사람 안에 겸손을 심어준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가까이 다가가는’ 코르반의 경험입니다. 창조주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도록 허용하는 것은 자아의 무효화, 그리고 거만의 속성을 깨뜨리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창조주를 달래려는 시도와는 거리가 멀어, 그분은 진정으로 우리로부터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시기에 창조물의 새로운 연합을 이루고자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하쉠께선 변하지 않으시지만, 그분의 좋으심을 받을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합니다.


제물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제물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려면 우리의 타고난 자아중심적 본성을 뒤집을 작업이 있는 강렬한 내부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이기적인 자기애를 바치고 그로부터 이별하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참 사랑을 드러내고 체험할 수 있으며, 하쉠의 형상대로 창조된 더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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