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이번 주에 우리는 윤년이 아닌 해에 자주 함께 읽히는 마지막 두 파라샤, 바야크헬과 페쿠데이를 같이 읽음으로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의 토라 읽기를 마무리합니다.
바야크헬의 첫 번째 파트는 ‘그가 모았다’를 의미하는 35장부터 시작합니다.
욤 키푸르(대속죄일) 다음날 아침에, 모셰는 하쉠의 명령을 받기 위해 온 민족을 모읍니다.
샤바트(안식일)를 준수하도록 그들에게 지시하고나서, 모셰는 마음이 자원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쉠을 위한 헌납물을 취하도록 하쉠의 지시를 전달했습니다.
이것은 성막의 건축을 위해 하쉠의 지시에 따라 필요했던 모든 귀한 재료들을 앞으로 나와 기부하라는 요청이었는데, 첫 번째 욤 키푸르에서 하쉠께선 백성들이 금송아지의 잘못을 저질렀던 걸 용서하시고, 그분의 ‘영원한 사랑’의 큰 증거로 성막 건축을 통해 백성들에게 입증하고 내면화되어서 그분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심을 증명한다고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큰 열심으로 그 부름에 응답해서, 그들이 가져온 헌납물들은 필요한 것 보다 넘쳤습니다.
모두 엄청난 동기부여를 받았고, 그들은 이 위대한 ‘베푸는 정신’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36장에서 ‘그들이 이쓰라엘 아들들이 성소의 작업 일을 위하여 그것을 하기 위해 가져온 모든 헌납물을 모셰 앞에서 취했다...’라고 배웁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아침마다 자원제물을 가져왔다. 모든 지혜로운 거룩한 모든 작업을 하는 자들이 각자 행하던 그들의 작업으로부터 와서 모셰에게 말했다. 이르기를, “백성이 하쉠께서 행하라고 명령하신 작업 일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가져오고 있습니다.”’
‘모셰가 명령하여 그들이 진에 소식을 전했다. 이르기를, “남자나 여자나 성소의 헌납을 위한 작업을 더 이상 하지 않도록 하시오!” 백성이 가져오는 것을 그쳤다.’
‘작업물이 그것을 만드는 모든 작업을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따라서 파라샤트 테루마, 테짜베 및 키 티싸의 일부 외에도 바야크헬과 페쿠데이도 이제 성막 및 그 기물들과 함께 토라의 다섯 부분을 만들며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복이 없어서, 이전 파라샤들에서 나눠진 세부 사항들은 전능자께서 그에게 성막의 계명과 그 세부 사항들을 가르칠 때 모셰가 시나이 산에서 하쉠과 함께 보냈던 개인적인 시간을 엿볼 수 있게 해주고, 바야크헬과 페쿠데이의 일부는 모셰가 사람들에게 하쉠의 계명을 전하고 계획들을 즉시, 그리고 열정적으로 완료한 후에 마지막 세부 사항을 정확하게 따져 누락되거나 설명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실시간 보고서를 제공해 줍니다.
‘그의 마음이 자원하는 모든 자는 하쉠의 헌납물을 가져오되, 금, 은, 구리, 하늘색실, 보라색실, 진홍색실, 아마실, 염소털,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들, 탁하쉬 가죽들, 아카시아 나무들, 등불을 위한 기름, 관유를 위한 향유들, 분향을 위한 향들, 에포드와 흉패를 위한 쇼함 돌들과 끼울 돌들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파라샤트 바야크헬은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슈모트 25장의 파라샤트 테루마와 명백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동일한 언어를 사용해 그것을 꿰매죠.
25장은 하쉠께서 모셰에게 “이쓰라엘 아들들에게 말하여 나를 위하여 헌납물을 취하게 하라. 그의 마음이 자원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너희는 내 헌납물을 취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번 파라샤인 바야크헬에서 모셰는 전체 회중에게 “너희 자신으로부터 하쉠을 위한 헌납물을 취하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음을 한 번 열어보세요.
이 평행법의 핵심은 ‘레킥하’라는 어법입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하쉠께선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를 위하여’ 또는 ‘너희 자신으로부터’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주는/베푼다는 의미를 가진 ‘나트나’가 아닌 ‘취하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건 좀 이상해 보이죠?
그 두 구절에 관한 명백히 잘 알려진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토라는 왜 ‘주는’ 것이 아니라 ‘취하는’것이라는 말을 사용하나?’
기부하는 사람은 ‘취하는’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선의를 위한 솔직한 질문을 한 번 던져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제 노예 생활에서 갓 벗어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 한복판에서 이런 기물들을 생각해 낼 수 있었을까요?
누가 금속들과 더불어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이나 탁하쉬 가죽, 그리고 기름과 보석들을 가지고 광야를 여행한다는 겁니까?
그래서 논의되는 많은 내용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 중 일부는 실제로 사전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 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하쉠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실 것을 예언적으로 알았던 족장인 야아코브(야곱)로부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들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야아코브는 그의 아들 요쎄프와 재회하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에 나무도 심었는데, 그 나무가 자라서 장차 그의 후손들에게 성막의 기둥을 위한 나무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미드라쉬의 내용 중에는 만(만나)과 함께 떨어진 쇼함 돌들 같은 어떤 항목 중 일부는 하늘에서 직접 보낸 것이라는 의견을 밝히기도 합니다.
어쨌든 대부분의 자료와 관련해 두 가지의 주요 출처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먼저는, 이집트 탈출 당일 밤에 토라가 35장에서 우리에게 알려준 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 사람들로부터 금과 은 및 기타 귀중품들을 받았다는 것이 있고, 그리고 두 번째로 미드라쉬에서 얘기하는, 쑤프 바다(홍해)에서 이집트군의 보물들이 거센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 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걸 해안가에서 손으로 줍기만 하면 되게 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하쉠의 큰 축복입니다.
바다가 갈라짐으로 공급된 것은 ‘너희 자신으로부터 하쉠을 위한 헌납물을 취하라. 그의 마음이 자원하는 모든 자는 하쉠의 헌납물을 가져오되...’라는 모셰의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그들이 기부로 가져온 대부분의 재료에 대한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시만요,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하쉠께로부터 받은 선물을 하쉠께 주었는데, 그들의 관대한 마음에 대해 칭찬을 받았나요?
여기서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제가 다른 질문을 해보죠.
거룩하고 복되신 분께서 단순히 해변을 정리하고 그 해변에서 금과 은을 모아 성막을 짓는 일을 할 한 사람을 임명하라고 모셰에게 단순히 지시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요?
그분께선 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구성원이 그 물질들을 먼저 ‘개인 소유’로 삼고 마음에 동기부여를 받은 사람이 그것들을 성막을 향해 앞으로 가져오게 하셨을까요?
왜 이런 빙빙 도는 방식이었을까요?
하쉠께서 친히 계획을 세우고 ‘섭리적으로’ 그분의 집을 지을 때가 되었을 때 재료를 보다 쉽게 구할 수 있게 하신 후, 사람들에 관한 이런 추가 조치를 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진실은, 하쉠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인 ‘그분의 선물’을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가져가고, 그 후 기부로 돌려주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가 된 것을 주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부가 됩니다.
그분께선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눈에 들게 하셔서 그들에게 선물을 가득 주도록 하셨고, 그들에게 바다에 있는 보물을 주셨으며, 심지어 하늘로부터의 선물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 되었고, 그 중에서 하쉠을 위한 몫을 취하도록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전부 나로부터야. 내가 내 땅에서 일하고, 내가 생산해 내는 것이 내 것이야.’
그런데 진실은 모든 것이 그분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수고를 통해 선물을 받든, 벌을 받든, 또는 노골적인 선물이나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여부이든지 말이죠.
모든 것이 똑같이 모든 것이 하쉠의 것입니다. 그분께선 그분의 넓고 풍성한 손으로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비드 왕이 디브레이 하야밈 상권(역대상) 29:14에서 매우 아름답게 표현했듯 우리 자신으로부터 그분께 돌려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누구이며 제 백성이 누구라고 우리가 이렇게 자원제물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당신으로부터 나왔으니 우리가 당신께 드린 것이 당신 손으로부터입니다.’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이제 이것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성막에 대한 이러한 기부와 관련해 토라가 ‘주는’ 것이 아니라 ‘취하는’것이라는 언어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부하는 사람은‘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렇죠?’
틀렸습니다. 베푸는 것은 미드라쉬 아가다에서 말하듯 하쉠으로부터 취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그분의 것을 당신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쉠께서는 예언자 하가이(학개)를 통해 2장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은도 내 것이고 금도 내 것이다. (만군의 하쉠의 말씀)’
미드라쉬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거룩하고 복되신 분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기부하고 성막을 건축하라. 그리고 모든 것은 내 것이기 때문에 너의 소유로부터 기부한다고 말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나를 위하여...취하라, 이미 내 것인 것에서 가져가라.”라는 것의 의미다.’
유대 현인들은 모든 것이 하쉠의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주는’ 것은 실제로 ‘취하는’것이라는 걸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하쉠께 드리는 것은 그것이 속한 분으로부터 취해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쉠께선 우리의 기부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마음은 원하십니다.
주는 일에 관해, 우리는 우리가 소유라고 느끼는 것과 헤어지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배우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미드라쉬는 누군가가 쩨다카(자선)를 베풀 때 그 행위는 자신에게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세상의 한 쪽 끝에서 다른 한 쪽 끝까지’ 창조물 전체에 이익이 됨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것이 드바림(신명기) 15:11에서 얘기하는 ‘너는...반드시 네 손을 펴야 한다.’의 의미로,당신이 가난한 자에게 손을 편다면, 당신은 당신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서도 축복의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하늘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거룩한 바알 쉠 토브의 가르침은 자선이 개인과 모든 창조물에게 혜택을 준다는 개념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진정으로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한다. 그가 누군가에게 화를 내면 그의 분노는 자신에게 돌아오며, 사심 없이 다른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 때 그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게 자선을 베푸니 친절이 그의 머리 위로 돌아온다.’
그분의 사랑이 모든 창조물을 이롭게 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떻게 기능합니까?
거룩한 바알 쉠 토브는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 모든 좋은 행위로 특히 친절과 자비의 행위를, 그리고 반대로 모든 부정적인 행위를 가르칩니다. 한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혼자인 개인은 진공 속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이 창조된 세상의 모든 면에서 밀접하면서도 복잡하게 묶여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계속 자선을 베풀면 내 재산이 줄어들 것이다’라고 말하지 마세요. 사실은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더 많이 줄수록, 더 많이 얻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기적을 구하거나 우리의 선행에 대한 즉각적인 보상을 요구함으로 드바림 6:16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하쉠, 너희의 엘로킴을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명 받았으나, 이에 대한 유일한 예외는 자선의 계명입니다.
하쉠께선 예언자 말락히(말라기)를 통해 3:10에서 우리에게 그분을 시험하도록 도전할 것을 외칩니다:
‘모든 십일조를 창고에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만군의 하쉠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하늘의 창문들을 너희에게 열어 내가 한없는 축복을 너희에게 부어 주는 것으로 나를 시험하라.’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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