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세상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죄가 무엇이고, 거의 또는 전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누구나 돌처럼 차가운 살인자로 만들 수 있는 게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이번 주에 윤년이 아닌 대부분의 해처럼 토라 바이크라(레위기)의 두 파라샤인 타즈리아와 메쪼라를 12장부터 읽는데, 이 두 파라샤는 히브리어로 ‘짜라아트’라고 알려진 고통, 네가 짜라아트(נגע צרעת)의 주제를 다룹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중 누구도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나 앞으로도 보지 못할 가장 특이한 병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일어나는 게 아니죠.
사실 이 놀라운 상태는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다른 어떤 나라가 경험한 적도 없으며, 역사의 특정 시대에서만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이 특정 시대에 국한된 예외적인 상황이었다면 왜 그런 ‘일회적인 현상’에 대한 것이 신성하게 기술된 영원한 토라에서 그렇게 많은 파라샤를 차지할까요?
토라에 기술된 이 ‘질병 같은’ 증상은 어떤 의사에게도 알려진 것이 아니며, 어떤 병명으로도 언급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소에서 섬기는 아하론(아론)의 후손인 제사장들 코헨들만이 진단을 내릴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치료를 감독할 수 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WHO, CDC, MD 모두도 아니고, 오직 코헨 말고는 누구도 진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선언할 때만 그 개인의 상태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번 첫 번째 파라샤는 코헨에 의한 진단과 고통이 식별되는 방식을 설명하며, 두 번째 파라샤에서는 짜라아트의 고통을 받는 사람이 정화되어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는 방식을 설명합니다.
이 짜라아트라는 ‘감염’의 확산은 외부에서 시작해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부로 이동하는 전개입니다.
이번 파라샤의 구절에서 그 단계는 연대순으로 나타납니다. 그 고난은 처음에는 가정의 벽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 다음은 가까이 다가와 옷에서 나타나고, 그에 대한 치유의 진전이 없으면 그 후에 사람 개인의 몸에 나타납니다. 그 고통의 특징적인 증상은 복잡하고도 다단계적입니다.
이러한 세부 사항 중 짧게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어떤 한 남자가 아침에 일어나서 집 벽에 있는 빨갛거나 녹색의 얼룩을 발견합니다.
그는 코헨을 불러와서 이것이 실제로 짜라아트인지 즉시 확인합니다.
결정하는 것은 코헨에게 달려 있는데, 만약 짜라아트가 맞다면 코헨은 그 집을 7일 동안 폐쇄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끝나면 코헨은 다시 확인하기 위해 돌아와서 짜라아트가 줄어들면 그것을 벗겨낼 수 있고 그 집이 깨끗하다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그대로 남아있거나 더 커지고 확장된 경우라면 그 집은 추가로 일주일 동안 폐쇄되어야 하죠.
이 두 번째 주가 끝날 때 다시 변화가 없다면 짜라아트가 나타난 부분을 벗겨내고 새로운 돌로 교체해서 새로운 회반죽으로 덮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다시 나타나게 되면 그 집은 불결하다고 선언되어 완전히 철거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그 고통은 개인의 옷감에 빨갛거나 녹색의 얼룩으로 나타나며, 사라지지 않고 더 커진 것이 확실하면 그 옷감은 태워져야 하며, 마지막 단계에서는 네가 짜라아트(נגע צרעת)의 고통이 그 사람의 몸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 남자는 흰 색의 작은 얼룩을 보면 다시 한 번 코헨을 불러와서 그를 확인시켜 주어야 합니다.
코헨은 해당 부위의 털 또한 하얗게 변했는지, 그리고 해당 부위가 피부 속으로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지 확인해서 그것이 맞는 경우 그 개인은 ‘메쪼라(짜라아트에 걸린 자)’로 선언됩니다.
여기서 마음을 열어보세요.
이 구절 전체에서 토라는 이 고난의 원인이나 배경을 특별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게 다 무엇에 관한 것일까요?
많은 성경 버전이란 것에서 ‘나병/문둥병’ 등으로 번역되는 짜라아트는 그러한 피부 질환이 아닙니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번역입니다.
옷이나 집 벽에도 나타나는 피부병을 들어본 적 있나요?
토라는 코헨을 ‘영적인 의사 역할’을 감당하는 진찰사로 지정하는데, 그것은 짜라아트의 발생이란 것이 외부의 부정적인 고통을 통해 나타나는 영적 수준의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그 현상은 한 개인의 도덕적 쇠퇴에 대한 육체적인 반응입니다.
유대 현인들은 짜라아트가 라숀 하라(악담)의 결과라고 가르칩니다.
탈무드에서 레쉬 라키쉬는 ‘이것이 메쪼라의 법칙이다’라는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메쪼라는 고통받는 개인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로, 현인은 대답하길 ‘이 말은 바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자의 법이 될 것’이라는 개념을 전달하는데, 그것은 ‘짜라아트의 고통을 받는 자’라는 메쪼라라는 단어 자체가 ‘악을 이끌어내는 자’라는 ‘모찌 라(מוציא רע)’의 축약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짜라아트와 악담 사이의 연관성이 토라 자체에서 명백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토라는 악한 말인 라숀 하라의 직접적인 결과로 발생한 짜라아트의 두 가지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하쉠께서 덤불 가운데서 모셰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이집트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셨을 때 모셰가 그것을 ‘실패할 운명’이라 주장하면서 그 사명을 거절하던 때가 그 중 하나로, 그는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4:1에서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이스라엘 자손들이 수 년간의 종살이와 고통 끝에 구속의 때가 왔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라숀 하라입니다.
그가 왜 이스라엘 자손의 믿음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인 가정을 해야 하나요?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그 즉시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하쉠께서 그에게 옷 속에 손을 넣어보라고 지시하고 그가 손을 넣었다가 빼내었을 때 그 손이 눈처럼 하얀 짜라아트로 뒤덮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모셰의 누나인 여예언자 미르얌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그녀는 예언을 받기 위한 영적 준비의 일환으로 자기 아내와 떨어지는 동생 모셰의 극단적인 행동에 대해 아하론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바미드바르(민수기) 12장 말미에 기록된 사건으로 이번 파라샤보다 뒤의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미르얌은 그런 말을 하자마자 그녀의 온몸이 짜라아트로 뒤덮입니다.
따라서 토라는 이렇게 짜라아트가 ‘악한 말’을 하는 것에 대한 반응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깊이 열어보세요.
이러한 유형의 ‘말’에 대해서 그 범법자에게 이토록 어렵고도 충격적이며 고립적인 질병을 맞게 할 정도로 심각한 반응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날은 나쁜 말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창피를 주는 관행이 너무 널리 퍼져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로 세상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저지르기 쉬운 죄인 것입니다.
심지어 탈무드 시대에도 유대 현인들은 악담인 라숀 하라가 사람이 ‘매일 아무 생각 없이 범하는 죄’라고 가르칩니다.
그럼 만약에 사람들이 영적으로 훨씬 더 진보한 때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은 사람들이 가십거리, 비방,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수치를 가져오는 비열하고 냉소적이며 비판적이고 모욕적인 ‘관찰’을 들으며 퍼뜨리고 공유할 수 있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이 넘쳐납니다.
그 대화에 관련된 그 누구도,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그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해하다고 느끼는 것과는 반대로 ‘말’은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그에 대해 상처를 받죠.
따라서 이 토라 파라샤들은 우리에게 그 주제를 명확히 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라숀 하라라는 용어는 실제로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범주를 지닙니다:
만성적인 라숀 하라 그 자체가 있으며, 진실해 보이고 표면적으로는 경멸적이지 않아 보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어떤 종류의 당혹감이나 괴로움, 또는 두려움이나 모든 종류의 신체적, 가족, 재정적 피해 등을 유발할 수 있는 모든 말이 있고, 전적으로 사실이고 결백하게 말하더라도 토라는 여전히 그러한 말들을 금지합니다.
그것들은 말하는 것도 금지되고 듣는 것도 금지되며, 듣는 사람이 믿는 것 또한 금지됩니다.
그 다음 ‘아바크 라숀 하라’라는 것도 있는데, 문자 그대로 ‘먼지 같은 악담’이라는 의미의 일종의 가벼운 라숀 하라입니다.
이건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누군가의 이름이 언급될 때 어떤 이는 얼굴을 찌푸리거나 다음과 같이 암시로 가득 찬 내용을 말하는 식입니다: ‘나한테 뭘 봤냐고 묻지 말고 그냥 그렇게 알아’
그런 것도 암시에 의하는 악담이지요.
그리고 현인들은 ‘그대가 아는 자를 그를 좋아하지 않는 다른 사람 앞에서 좋게 얘기하는 것’ 또한 아바크 라숀 하라라고 가르치는데, 그것은 그 듣는 이가 그를 싫어함으로 인해 부정적으로 대답하는 반응만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십거리’로 가장 잘 번역되는 ‘렉힐루트’도 있습니다.
바이크라 19:16에서 유대인들은 ‘너는 네 백성 가운데서 험담(락힐)하며 다니지 말아야 하며...’라고 명령 받습니다.
‘락힐’이란 단어는 ‘퍼뜨리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유대 현인들은 묻습니다. ‘누가 험담꾼인가?’
‘그가 이렇게 말했어’, ‘나는 그렇게 들었어’ 등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자로, 그것이 모두 사실이고 경멸적이지 않은 경우에도 해당됩니다.
험담이란 건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하는’것이며, 이는 항상 부정적인 의견이나 그런 의견이 표현되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결론은, 토라는 그 당사자가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 한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 금지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험담하거나 그 사람에게 어떤 종류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라숀 하라로, 그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메쪼라에 걸린 라숀 하라를 말하는 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당신의 일에만 신경 쓰고 자신의 삶을 얻으며,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삶을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경고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주고자, 또는 기타 건설적이고 이타적인 이유로 라숀 하라를 하는 것이 허용되는 예외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 적용되는 복잡한 조건이 많아 주의 깊게 공부해야 합니다.
이러한 형태의 말의 금지가 그토록 심각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간단한 설명으로는,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사람이 멀리 쏘는 화살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날아가죠.
한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말을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그 말들은 마치 전 세계에 방영되는 듯이 계속해서 ‘여행’합니다.
그 당시 초기 시대의 현인들이 그 묘사를 사실로 여겼다면 우리의 말과 글이 문자 그대로 ‘순식간에 전세계로 전파되는’ 오늘날에는 도대체 얼마나 더 사실이란 얘기일까요?
미슐레이(잠언) 18:21은 ‘죽음과 삶은 혀의 힘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탈무드 현인들은 그에 대해 ‘혀에 손이 달려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답하기를, 그 구절은 ‘손이 죽일 수 있는 것처럼 혀도 죽일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할 때, 라숀 하라의 말이든 경멸적이지 않은 순진한 가십거리든, 말이란 것이 궁극적으로 피해를 주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을 강조합니다.
표면상 이야기거리가 많은 정보라도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그 사람의 최선의 관심사를 염두에 두지 않은 자가 맘대로 사용하고 조작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물론 단순한 의미의 수준을 넘는 이 역학을 이해하는 더 깊은 수준이 존재합니다.
토라의 더 깊은 비밀은, 말의 힘이 두 가지 층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말은 두 가지 수준에 존재하는 현실을 만들어 내는데, 첫 번째 수준은 한 개인의 말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며, 더 깊은 수준으로 들어가 보면,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음파가 여전히 영원하게 대기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으며,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인상을 남깁니다.
말이란 것은 입에서 나오자마자 ‘영구적인 현실’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기는 부정적 표현들의 화학적 흔적으로 범벅 됩니다.
메쪼라 파라샤의 강력한 의미와, 개인 자신의 영적 측면과 물질적 본성 사이의 새로운 균형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정화 및 회개 과정의 세부 사항처럼, 이번 파라샤에서는 배워야 할 더 많은 세부 사항들이 있습니다.
하쉠께선 개인의 재산을 치는 과정으로 시작해서 그 후에야 개인을 깨우고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회개할 기회를 갖게 해주고자 그 개인을 공격합니다.
정화의 과정은 이 고통 당하는 자가 그의 집을 떠나서 진영/성 밖에서 완전히 고독하게 거할 것을 요구합니다.
일시적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된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손/혀로부터 겪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라숀 하라를 말하는 자는 그의 말하는 대상이 배척 당하고 고립 받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짜라아트에 걸린 자는 집에서 격리 장소로 가는 내내 ‘불결하다, 불결하다!’라고 선언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불결하다고 거리를 두어야 함을 외치면서 그 접근 금지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의 격리조차도 ‘신성한 친절함’으로, 유대 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외침을 들으면 그의 곤경에 인상을 받아 그를 위해 기도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짜라아트의 고통은 그렇게 ‘형벌’이 아니라 자기 파괴적인 행동인 혼수 상태에서 사람을 깨우기 위한 하쉠의 놀라운 친절하심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은 ‘분노와 약탈적인 하쉠’의 작품이 아니라, 밧줄을 던지고 잘못된 것의 교정에 신호를 보내어 잃어버린 영혼이 자신의 인간성을 연마하고 매 순간의 잠재력에 다시 민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사랑의 하쉠’의 작품입니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는 채널을 열어서 수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고유한 영적 목표를 가진 오메르를 세는 치유의 달, 이야르 월에 매우 적절한 것입니다. 행동과 동기를 부여해서 우리도 토라가 구상하는 의로운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신성한 신호’를 받을 자격조차 없는 상태입니다.
병든 영에 대한 이 외적 계시는 지식의 세대에서만 나타났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러한 현현을 위한 자리조차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메쪼라들로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혀를 지키기’와 ‘호페쯔 하임’의 저자인 거룩한 라브 이쓰라엘 메이르 카간은 그의 유명한 작품의 제목을 따서 ‘호페쯔 하임’으로 불립니다. 호페쯔 하임이란 뜻은 ‘삶을 갈망하다’를 의미합니다.
그 어원은 ‘생명을 원하는 사람이 누구냐?’라고 하는 트힐림(시편) 34편을 근거로 합니다.
그는 193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거룩한 사람이었고 문자 그대로 현대의 ‘금지의 말’에 대한 인식의 아버지였습니다.
한 번은 그가 집으로 걸어가는데 말이 끄는 마차가 그의 옆에 멈춰 섰습니다.
그를 알지 못한 마부가 그에게 ‘위대한 의인인 호페쯔 하임께서 어디 사는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라브는 그에게 방향을 가리키면서 ‘그는 별로 대단하지 않소’라고 답합니다.
마부는 너무 화가 나서 말을 때리던 채찍으로 호페쯔 하임을 때렸는데, 나중에 그 마부가 도착해 집에 들어갔을 때 그날 아침에 때렸던 자가 호페쯔 하임임을 보았을 때 그는 기절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진정 위대한 호페쯔 하임은 그를 진정시키며 오늘 새로운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자신에 대해 라숀 하라를 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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