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이번 주 이스라엘 땅에서의 토라 부분은 바미드바르(민수기) 13장에서부터 시작되는 네 번째 파라샤인 파라샤트 쉘락흐입니다.
이 파라샤는 정탐꾼들의 중대한 죄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도착하기 전, 지파마다 각 한 사람씩 열 두 명을 보내 본래 크나안(가나안) 땅이었던 곳을 정탐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유대 현인들은 이 임무가 하쉠의 생각이 아니었으며, 사람들의 바람이었고 하쉠께선 묵인하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정탐꾼 각 사람은 각 지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이 떠날 때, 그들은 의로웠고 훌륭했죠.
그 땅을 40일 동안 돌아다닌 후, 그들은 돌아와서 모셰와 아하론과 이스라엘 아들들의 온 회중에게 보고를 하는데, 정의로움을 굳게 지켰던 예호슈아와 칼레브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자기들이 본 땅에 대해 ‘우리가 다녔던 땅이 주민들을 삼키는 땅이다!’라고 악평하며 이스라엘에게 고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쉠께서 택한 귀한 땅에 대해 대적하는 최악의 라숀 하라(험담)로, 비방적이고 근거 없는 부정적 보고였습니다. 결국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방향을 바꿀 끔찍한 민족적 재앙을 촉발시키죠.
14장에서 설명하듯, 정탐꾼들의 보고는 민족을 절망에 빠뜨리는데 성공합니다.
‘모든 회중이 소리 높여 그들의 소리를 냈다.백성이 밤에 울었다.’
유대 현인들이 가르치는 바 대로, 하쉠께선 그 민족이 이유 없이 울었던 것으로 인해 그것을 ‘울음의 밤’으로 정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성전이 파괴되고 같은 날에 계속해서 많은 재난이 있게 될 아브 월의 아홉 번째 날인 티샤 베아브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비드 왕이 ‘그들이 탐스러운 땅을 거절하고’라고 트힐림(시편) 106:24에서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선동으로 인해 귀한 땅을 멸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여전히 세대에 걸쳐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대격변의 영향을 미치고 있죠.
이 부분을 매년 다시 읽어도, 황폐함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으며, 우리는 해마다 똑같은 고통스러운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여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정탐꾼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파들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 뛰어난 지도자들이 ‘극복할 수 없는 절망의 정신’으로 민족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감염시킨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들을 분해시킨 결정적 요인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쉠의 약속과 땅의 긍정적인 측면, 그리고 자신들의 영적인 잠재력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주관적인 두려움과 의심으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물론 영적이고 심리적인 다른 원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정탐꾼들의 죄는 모두 믿음의 부족으로 인한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고의 힘과 두려움, 그리고 의심에 굴복하는 위험성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예지요.
그렇기에 오늘 저는 다른 관점에서 이번 파라샤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긍정의 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쉠께선 이번 파라샤에서 그분의 연민과 끝없는 사랑의 표현으로 정탐꾼들의 죄를 바로잡을 ‘티쿤’의 기회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열어보세요.
그 모든 것은 에덴 정원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모든 것은 에덴 정원을 고치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스라엘 땅에 들어가는 것은 아담이 에덴에서부터 추방됨으로 야기된 피해를 해결하고 고치는 티쿤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야 하는 신성한 계획은, 아담의 죄와 에덴에서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영적인 성장과 함께 하쉠과의 연결에 대한 새로운 시대를 가져옴으로 인류를 위한 그분의 원래의 계획을 성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분과 ‘조화’를 이루는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것 말입니다.
정탐꾼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 하시겠다는 하쉠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직면하게 될 도전을 두려워했고, 그들을 보호 하시겠다는 하쉠의 능력을 의심하며 그 땅이 정복하기 어렵다는 보고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결핍은 에덴에서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는 하쉠의 명령을 의심했던 아담과 하바의 죄에 대한 연장선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풍요와 축복의 땅으로 묘사되는데, 이스라엘은 그런 땅에 들어가 거룩한 성전을 세우고 하쉠의 계명을 따라 생활함으로 ‘전 우주적인 축복’을 세상에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정탐꾼들의 대실패와 그 세대에 대한 선고가 내려진 후 있은 두 가지 계명에 의해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하쉠께선 이스라엘에게 15장에 나타난 것들을 이루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세대가 이행할 것이 아니라 광야의 세대가 지난 후 그 땅으로 들어가는 자손 세대가 이행할 계명이었습니다.
거룩한 성전에서의 술제물 계명과 할라빵 반죽에서 그 일부를 분리하라는 두 가지의 특별한 계명은 정탐꾼들의 죄를 바로잡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땅에 대한 계명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 땅의 본질과 독특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성전 제단에 부어지는 술제물은 하쉠의 땅에 흐르는 축복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표현이며, 할라빵의 반죽 일부를 분리해서 제사장들에게 주어야 하는 행위는 ‘물질’을 고양시켜 ‘물리적 세상의 영적 본질’을 인식하고 신성하게 하는 의미입니다.
비록 하쉠께선 그 세대가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정탐꾼들의 비방에 대한 형벌로 광야에서 죽을 거라고 정하셨고, 그 계명들이 이스라엘 땅에서만 고유하며 그것이 비록 제멋대로인 세대의 자손에 의해서만 성취될 문제더라도, 하쉠께선 그 계명을 ‘지금’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낭비되고 잃어버린’ 바로 그 백성에게 주심으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의 부족에 대한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쉠의 ‘입맞춤’과도 같았으며, 그분의 자비와 용서의 표시였고, 미래에 약속된 구속에 대한 희망인 것이었으며, 궁극적으로 민족이 그 땅으로 들어가 거룩한 성전을 짓고 자유 의지와 평화, 축제의 제물들과 함께 해방을 가져올 것이라는 확신인 것이고, 할라빵의 계명, 번영, 생계를 위한 식량 공급, 그리고 땅 자체와의 깨지지 않는 유대감도 예고해 줍니다.
이 두 계명이 발표된 시기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땅을 주겠다는 하쉠의 약속과 그분의 용서가 ‘정탐꾼들의 죄’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세대에게 확신 시켜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꼭 ‘당신’에 관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쉠의 말씀) 미래 세대들 또한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인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이번 파라샤의 끝에서 우리는 찌찌트의 계명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탈리트’처럼 네 개의 모서리가 있는 옷감의 가장자리들에 매달라고 하쉠께서 명령한 옷술인데, 가장 단순한 의미에선 이런 옷술들은 하쉠의 모든 계명과 그것을 이행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찌찌트의 술은 5개의 매듭으로 묶인 8가닥으로 구성되는데, 히브리어로 찌찌트의 게마트리아(숫자값)는 600이며, 그 8 가닥과 5개의 매듭을 합해 토라에 있는 계명의 수인 613을 이룹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로 무엇에 관한 걸까요?
하쉠께서 우리가 그분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길 원한다면 분명 ‘다른 기억 장치’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겁니다.
그분께선 왜 ‘생각나게 하는 것’을 우리의 옷에 둘 것을 명하셨을까요?
여기서 다시 한 번 모든 것의 뿌리였던 에덴으로 시선을 돌려봅시다.
아담과 하바의 죄는 ‘지배하려는 욕망’의 결과였죠. 좋은 것과 악한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짐으로 하쉠처럼 된다는 것 말입니다.
이 욕망은 그들이 에덴에서 쫓겨나게끔 만들었고, 이 세상에서 하쉠을 섬긴다는 것, 즉 인간이 자신의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재정의 했습니다.
그 이후로 모든 것의 목표는 에덴으로 돌아가 잃어버린 창조주와의 관계를 되찾는데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의복의 개념은 에덴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은 직접적인 결과로 세상에 오게 되었죠.
따라서 옷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베게드’는 반역, 배반을 의미하는 ‘보게드’와 관련을 가지게 됩니다.
아담과 하바는 자신들이 벌거벗음을 깨닫고 허리띠 같은 옷으로 몸을 가렸습니다.
자신들을 가리는 이 행동은 그들의 육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하쉠으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결과였고, 그들의 행동에 의해 만들어진 ‘이기심’이라는 환상의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죄를 짓기 전에도 벌거벗고 있었지만, 그 앞에서 육체와 관련된 수치심이나 죄책감은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순수한 의식 상태에 있었고, 그들의 몸을 가릴 육체적 옷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죄 이전에는 이기심이 없었으나, 그것에 굴복한 이후에 그들은 자신의 벌거벗음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그들을 위하여 띠들을 만들었다.’라고 베레쉬트(창세기) 3장에서 얘기한 것처럼, 나중엔 하쉠 자신이 그들을 위해 옷을 지어주셨습니다.
의복이란 것은 에덴에서의 죄로 인해 영향을 받은 물질계의 일부입니다.
광야의 세대에 대해 우리가 알게 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광야에서 유랑하는 동안 그들의 옷이 ‘그들과 함께’ 자라고 언제나 깨끗하게 유지되었다는 점입니다.
모셰는 ‘네 옷이 너로부터 낡아지지 않았고’라고 드바림(신명기) 8:4에서 증언하는데, 이것은 정탐꾼들이 죄를 지은 후 그들의 실패와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광야의 세대가 물리적 세계로부터 떨어진 매우 높은 영적 수준에서 살았던 것으로 인해 그들의 옷이 아담과 하바의 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은 죄는 마음과 눈을 좇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여자가 보니 그 나무는 먹기에 좋고 그것이 눈에 탐스럽고 그 나무가 지혜롭게 하기 좋아 보였다.’
눈으로 미혹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문제로,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은 ‘환상’이고 단지 ‘감각의 만족’일 뿐입니다.
죄는 그들의 영적 상태를 변화시켰으며, 그 결과로 그들은 육체적 의복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찌찌트의 명령이란 것이 어떻게 아담의 죄에 뿌리를 둔 정탐꾼들의 죄에 대한 신성한 반응인지, 그것이 어떻게 ‘티쿤’인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린 것입니다.
그들은 그 땅의 물리적인 면만 보았고, 위대한 영적 능력을 보지 못했으며, 하쉠의 땅에서 하쉠과 연결되어 세상에 축복을 가져와야 할 그들 자신의 잠재력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파라샤의 시작 부분에서 보듯 ‘베야투르 에트 에레쯔’, 즉 ‘베야투르’로 묘사되었는데, 이 단어는 탐험하고 두루 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정의로, 자신의 시야로 훑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대조해, 하쉠께선 15장 끝부분의 결론에서도 찌찌트와 관련해 같은 단어를 다시 사용하십니다.
‘(너희는) 음행하는 너희의 마음을 따라가거나 너희의 눈을 따라가 헤매지(타투르)말아야 한다.’
정탐꾼들의 눈은 물질주의의 신기루에 속았습니다.
물리적 실로 구성된 찌찌트는 우리를 통해 흐르는 영적 에너지를 나타내 주는 방식으로 묶여 있고, 물리적 세계 너머를 보며 모든 것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들여다 보도록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의 세계 안에서 신성한 불꽃과 연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의복에 찌찌트를 부착하는 것은 영적 뿌리에서의 의복의 개념에 대한 티쿤이며, 육체적 의복을 더 높은 영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 존재를 위한 그릇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 성장과 하쉠과의 연결을 위한 그릇이 되기도 합니다.
찌찌트의 계명은 (그것을 보는) 눈에 치유를 가져오고,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연결하는 우리의 능력을 구현 시키며, 하쉠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보호하며 인도 하신다는 것을 강하게 일깨워 줍니다.
우리의 눈은 항상 우리를 흔듭니다.
그 도전은 우리의 눈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든 하쉠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의심과 두려움에 직면할 때에도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정탐꾼들의 죄와 완전하게 반대되는 이 도전은,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에게 하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뢰를 촉진하는 변혁의 여정을 시작하게끔 재촉합니다.
무서운 시련에 직면할 때,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삼키고자 위협하는 의심과 불확실성의 그림자를 넘어서고자 신성한 연결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도전의 무게에 굴복하기보다, 하쉠의 섭리로 인한 자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긍정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가득 찬 사고 방식을 키워낼 수 있습니다.
삶이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힘든 상황에 처할 때, 우리의 믿음이 꽃을 피울 기회를 찾는 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본질과 끊을 수 없는 유대감을 형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무한한 힘과 회복의 저장소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쉠의 인도하는 손길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키움으로 우리는 가장 어두운 시간 속에 숨은 무수한 가능성에 우리 자신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믿음은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역동적인 힘입니다.
그것은 의심과 두려움의 경계를 넘어 모험을 하며, 희망, 긍정,신뢰가 주입된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손짓해 줍니다.
이러한 확고한 믿음을 통해, 우리는 불가능이 가능해지고 각 도전들이 성장과 초월의 기회가 되는 영역의 문을 열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상황을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결정됩니다.
정탐꾼들의 실패는 우리의 관점을 바꿔보면 ‘장애물을 디딤돌로’, ‘도전을 성장의 촉매로’, ‘좌절을 승리의 기회로’ 바꿀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그것을 성공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고양시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등불이 되어 희망이 지배하는 세상을 나타나게 해줄 것입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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