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이번 주 토라 부분은 베레쉬트(창세기) 41장부터 시작하는 의인 요쎄프(요셉)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파라샤트 미케쯔입니다.
지난 주 파라샤트인 바예셰브에서 우리는 요쎄프 자신이 꾼 것과 함께 옥에 갇혔던 파르오의 신하들의 꿈에 대해 이야기 했었습니다.
우리가 배웠듯이, 요쎄프에 관한 모든 것은 꿈과 연결되어 있지요.
그를 광야의 첫 구덩이에 가둬 놓은 젊은 시절의 꿈부터 이집트 감옥의 구덩이에서 일어나 세워지도록 했던 다른 사람들의 꿈, 곧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까지 한 꿈들 말입니다.
이번 부분은 파르오 자신의 꿈으로 시작합니다. 그 꿈은 그를 혼란스럽게 했고, 그 의미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파르오는 토라가 다음에서 얘기했듯이 자신의 꿈을 측근들에게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아침에 그의 영이 번잡했다. 그가 사람을 보내 미쯔라임(이집트)의 모든 강령술사들과 그곳의 모든 지혜자들을 불렀다. 파르오가 그의 꿈을 그들에게 이야기했으나 아무도 파르오에게 그것들을 해석해 주는 이가 없었다.’
이집트의 왕은 어리둥절해졌습니다.
그의 모든 지혜자들과 조언자들이 그의 꿈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천문을 보는 자들과 강령술사들이었고, 파르오 자신도 자연의 힘에 대해 잘 아는 자이기도 했습니다.
파르오는 자신의 꿈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도 꿈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아무도 그의 고통을 달래지 못하는 것에 좌절했습니다.
이 지혜자들은 어둠의 세력과 거래하는 데에 능숙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였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어째서 꿈을 해석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토실토실한 일곱 이삭과 건강한 소 일곱 마리, 그 각각이 다른 일곱의 쇠약하고 시든 것들에게 삼켜져 버렸다?
지금의 우리에겐, 특히 진실을 알고 있다는 우리의 사후 인식에서는 그것은 영양과 결핍, 그리고 풍요와 기근에 대해 뻔히 들여다 보이는 암시로 보입니다.
그런데 미드라쉬는 파르오의 지혜자들이 그 대신 일곱 마리의 소가 이어지는 이야기가 그가 일곱 딸을 낳고 일곱 딸을 모두 묻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일곱 이삭이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가 일곱 왕국을 정복할 것이지만 그 때 그 일곱 왕국이 그를 배반할 것이라는 것으로 해석했음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파르오에게 옳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조언자들과 공유했던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이해할 수 없는 상태는 모두가 요쎄프의 입장과 즉위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하쉠의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하쉠께서는 예샤야후(이사야) 44:25에 있는 말과 같이 그들의 조언이 혼란스러워지도록 그들로부터 해결책을 보류하셨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표징들을 헛되게 하시고 점치는 자들을 어리석게 만드시며 지혜자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사 그들의 지식을 말이 되지 않게 하신다’
파르오가 요쎄프를 받아들이고 그를 높이도록 준비시키는 것은 모두 하쉠 자신의 정교한 조정이었습니다.
이 꿈들은 정말로 헤쎄드, 즉 하쉠의 친절하심에 대한 표현이었습니다.
파르오는 국가의 지도자이고 많은 생명을 책임지는 자였습니다. 그렇기에 하쉠께선 그분의 자비로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그에게 보여주신 거였습니다.
파르오에게 필요한 준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그분의 신성한 지혜가 이집트에 선포된 것입니다.
요쎄프는 그 모든 꿈 해석들이 실패한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이 빠져 있었는지를 알았습니다.
요쎄프와 파르오는 정반대의 사람으로, 요쎄프의 의식은 결코 하쉠의 현실과 단절된 적이 없었고, 그의 삶의 모든 순간이 신성한 영감을 수용하는 그릇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파르오는 창조주 신을 완전히 부인했으며 하쉠의 신성한 섭리를 완전히 부인하는 자였습니다.
이집트의 세계관에서, 인간의 사건들이라는 것은 행성의 영향들로 인한 무작위적인 혼란스러운 영향이었습니다.
신성한 섭리는 우주의 창조자이자 통치자로서 하쉠 자신이 모든 창조물들을 지휘하고 모든 것을 감독하며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쉠께서 인간을 위해 이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에 그의 섭리는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모든 개개별 인간에게 미칩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저울질을 받으며,인간에겐 자신을 완성하고 좋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모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하쉠께선 각 사람을 그가 태어난 운명과 그가 성취하도록 창조된 목적을 향해 이끄십니다.
하쉠의 섭리의 수단은 꼭 명백한 기적을 통해서만은 아니고 일상의 일들을 통해서이기도 하며, 항상 인간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르메야후(예레미야)예언자는 그것을 32:19에서 요약했습니다:
‘계획이 크시고 행위가 크시며 인류의 모든 길들에 당신의 눈이 열려 있어 각 사람을 그의 길들과 그의 행위들의 열매대로 갚으십니다.’
파르오의 사고방식은 물질주의의 무작위적인 세계에 완전히 붙어 있었습니다.
그는 통일된 신성한 방향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었고 그의 세계는 분열된 현실의 환상으로, 인간은 그 게임에서 인질로 잡힌 채 자연에 의해 표현된 각기 대립하는 힘의 신들에 의해 싸워 댔습니다.
이런 결정론적 세계에서 인간은 상반되는 세력 간의 투쟁 한가운데 놓였습니다.
삶의 의미도 없고 인도됨도 없으며, 신의 섭리도 없고 오직 선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 간 끝없는 영원한 전투만 있었습니다.
그의 신들은 모두 땅의 요소들을 묘사한 것이었는데, 그의 세속성은 너무도 극단적이라 그의 이름에서도 암시됨을 볼 수 있습니다.
흔히들 ‘파라오’라 칭하는 히브리어 파르오는 하아파르(העפר; 흙)라는 단어의 철자와 동일한 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라브 박흐야는 하쉠께서 그에게 일곱 이삭과 일곱 마리 소라는 땅의 요소와 관련된 꿈을 보여주셨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다가올 풍년과 기근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것들의 상징주의는 실질적으로 모든 물질적 창조에 대한 하쉠의 섭리를 그에게 암시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가장 작은 세부 사항들까지도 하쉠의 직접적인 감독 아래에서 인간 창조의 경이로운 기념일이자 심판의 새해인 로쉬 하샤나에 제정한 그분의 법령을 따라 수행되기 때문입니다.
풍년과 기근에 대한 파르오의 꿈이 바로 이 로쉬 하샤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쎄프가 감옥에서 풀려나 파르오 앞으로 끌려간 날도 로쉬 하샤나였습니다. 이 날에 하쉠께서 온 세상과 모든 나라를 위한 공급과 생계를 선포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하쉠께서 파르오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에 대해 이제 마음을 더 깊이 열고 들어보세요.
“그리고 내가 내 꿈에서 보니 보라,한 줄기에서 알차고 좋은 일곱 이삭이 올라오고...” (41:22)
이 일곱 이삭은 실제로 ‘한 단위’이기 때문에 일곱 이삭 모두가 한 줄기에서 싹이 나왔는데, 마침 이번 주가 하누카의 안식일이기에 상기할 수 있는 것은 한 덩어리의 금으로 만든 거룩한 성전의 금 메노라와 같이 그 이삭은 가지와 꽃들과 잔과 받침이 있지만 나누어지지 않고 모두가 한 조각이었던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미드바르(민수기) 8:2에서는 ‘메노라의 얼굴을 향해 일곱 등불이 빛을 비추어야 한다.’라고 하는데, 일곱 개의 초는 빛이 통일되도록 밝혀야 하며, 더 이상 일곱 등불이 아닌 화합의 힘으로 빛나는 하나의 단위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쎄프는 파르오에게 ‘파르오의 꿈은 하나입니다’라고 알린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구성 요소가 하나이기 때문에요.
요쎄프는 이제 하쉠께서 하실 일을 파르오에게 말해줍니다.
“하쉠께서 당신에게 그분의 비밀을 밝히고 있습니다....그분께선 그가 세상을 어떻게 운영하는 지에 대한 비밀을 당신이 알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고, 당신이 본다고 생각하는 것과도 다릅니다.”
자연은 다양한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세상의 모든 다른 측면과 자연의 모든 현상을 움직이는 데에는 단 하나의 힘이 있습니다.
하쉠께선 파르오에게 이러한 꿈을 주셔서 그에게 오직 그분만이 1차적인 원인이며, 이 세상은 그분만이 감독하신다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풍요와 기근, 그리고 인간 존재라는 것의 모든 변수는 그분으로부터만 오며, 그분만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것들을 조정하시고, 인간에게 상과 벌을 내리십니다.
하쉠께서 파르오에게 전한 메시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영원한 메시지입니다.
이제 들어보세요, 외적인 세계라는 것은 하나의 큰 거짓말입니다!
파르오와 그의 모든 지혜자들은 신성한 섭리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창조주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사건이 다양한 힘과 에너지, 별 등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들로부터 답을 구했습니다.
그렇기에 요쎄프는 로쉬 하샤나 아침에 깊고 어두운 지하 감옥으로부터 빼내어져 말끔하게 단장되고 이집트의 왕 앞으로 불려와 ‘너가 꿈을 들으면 그것을 해석한다고 들었다’라는 파르오의 말에 “제가 아니고 엘로킴께서 파르오의 평안을 위해 대답하실 겁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쎄프가 파르오에게 말한 의미는 ‘당신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 하쉠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엉뚱한 곳에서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마술도, 천문학도 아닌데, 당신을 둘러싼 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부과한 갇혀 있는 한계를 넘어 볼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꿈의 진짜 의미는 우리의 모든 꿈의 의미이고, 다음과 같은 모든 것의 의미인데, 세상엔 오직 한 분인 신이 있다는 겁니다. ‘파르오의 꿈은 하나의 꿈’... 하쉠께서 하실 일을 파르오에게 말씀하신 건 그거입니다. 오직 한 분만이 계시며 그분께선 이 세상과 모든 세상을 다스리시고, 그분께서는 당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낳고 불러오셨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으며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나오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 그분은 변하지 않으셨고, 않으시며,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의 단일성은 모든 것 중에 가장 큰 유일한 힘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의 인생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이번 파라샤인 미케쯔는‘~끝에’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파라샤의 시작 구절이 ‘꼬박 2년이 지난 끝에 그 일이 일어났으니’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립니다.
그것은 요쎄프의 감옥 생활의 끝이었습니다. 하쉠의 원대한 계획 안에서 요쎄프가 석방될 정확한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미케쯔의 어근인 ‘케쯔’는 끝, 결론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법이죠.
미케쯔의 시작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지하 감옥의 포로 상태에서 이집트의 지도자로 변하는, 요쎄프에게 즉각적인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토라 전통의 틀 안에서 끝을 의미하는 단어인 이 ‘케쯔’라는 것은 특히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는 끝’이라는 개념으로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케쯔 하야밈’, 즉 ‘마지막 날들’이라 알려진 시간처럼 큰 변화의 전조의 의미로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은 고쳐져야 하며, 온 인류는 유일하신 하쉠을 인정하는데 연합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기에 이번 파라샤의 교훈은 이미 마지막 날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번 파라샤에 대해 미드라쉬는 시작 구절인 ‘바예히 미케쯔 슈나타임 야밈 (꼬박2년이 지난 끝에 그 일이 일어났으니)’이란 구절을 이요브(욥) 28:3에서의 구절과 연결합니다.
‘그가 암흑을 끝내고 모든 것의 끝을 측량하니 곧 어둠의 돌이요 죽음의 그늘이다.’
라브 박흐야는 하쉠께서 모든 것의 한계를 설정한다고 가르치는데, 요쎄프의 감옥에서의 시간을 종식시킨 것, 그리고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에서 배우는 것처럼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을 끝내신 것 등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그가 암흑을 끝내고’라는 이요브의 말은 하누카 시대에 대한 암시였습니다.
그리스-시리아의 왕이었던 안티오쿠스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성전을 더럽히면서 토라 공부와 준수에 반대하는 법령을 제정했던 ‘그리스의 포로’로 알려진 기간 말입니다.
유대 현인들의 글은 그 기간을 ‘암흑’이라고부르는데, 미드라쉬는 베레쉬트 1:2의 ‘암흑이 깊음의 표면에 있고’라는 말이 바로 그 기간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소의 뿔에다가 ‘우리는 이스라엘의 신으로부터 아무 몫이 없도다’라고 쓰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암흑을 끝내셨고, 그 어둠의 세력은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파라샤가 시작되는 단어 미케쯔는 그렇게 이집트에서의 요쎄프의 이야기와 하누카의 기적을 연결하며 마지막 날까지 이어지는 다리가 되어줍니다.
때로 우리는 모두 파르오와 그의 조언자들처럼 ‘우리 자신의 마음’이라는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인생에서 암흑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온 세상의 삶도 암흑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의 시대는 끝나고 그는 암흑을 끝낼 (이요브 28:3)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좀 더 마음을 열어보세요.
끝을 의미하는 단어인 케쯔는 일어나다, 깨어나다라는 뜻의 ‘예키짜’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입니다.
새로운 시작으로 이제 일어날 시간입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어둠이 있을 것인지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요쎄프는 이집트의 지하 감옥이라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었습니다. 더 이상 그보다 어두워질 수 없을 정도였죠.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그는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누가 그를 거기에 두었는가?’
그는 자신을 그곳에 두신 분이 하쉠이심을 알고 있으면서 하쉠을 신뢰했던 이유가, 그것이 그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룩한 바알 쉠 토브는 감옥에 있던 요쎄프의 모든 이야기가 하쉠을 신뢰하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진실입니다. 하쉠께서는 각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자신의 구원이 하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그분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정도에 따라 비례합니다.
의인 요쎄프가 구덩이로부터 신성한 임명에 의한 이집트 지도자의 지위에 오르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하쉠에 대한 믿음과 신뢰 수준에 대한 교훈입니다.
요쎄프의 시련, 시험, 꿈들...그 뿐만 아니라 파르오의 신하들과 파르오 자신의 꿈, 하누카의 기적인 ‘기름의 기적’과 하슈모나임(하스모니안)의 군사적 승리...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소스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의 임재로 리드되는데, 단순히 그분의 임재에 이끌리는 것이 아닌 그분의 개인적 관찰, 개인적 지휘,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삶의 모든 미묘한 차이에 관여하는 것으로 이끌려집니다.
우리의 도전은 그 신성한 섭리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인식하고 인정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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