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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Adam Lee

파라샤트 하예이 싸라 5783

샬롬, 이번 주 토라 부분은 베레쉬트(창세기) 23장에서 시작되는 ‘싸라(사라)의 삶’을 의미하는 하예이 싸라입니다.

이번 주의 부분은 싸라의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싸라는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한 예언자였고, 아브라함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도 오직 싸라와 함께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부분은 아브라함이 매장을 위해 헤브론에 있는 막흐펠라(막벨라)를 구입한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아브라함은 오래전부터 그곳의 거룩함과 아담과 하바(하와)의 매장지였던 동굴이 ‘예언적 경험’을 통해서 에덴 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알고 있었으며, 그 땅이 하쉠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의 자녀들이 물려받을 열쇠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영원한 매장지로 확보를 한 것이며, 그와 이쯔학크(이삭)와 리브카, 야아코브(야곱)와 레아도 함께 그곳에 묻힐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산을 물려주는 구절의 전환에 대한 토라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이 헤브론의 막흐펠라 밭을 사서 싸라를 장사 지낸 후에, 그의 우선 순위는 아들 이쯔학크를 위해 의로운 아내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장 깊은 영적 수준에서 싸라와 연합했던 것처럼, 이제 이쯔학크와 함께 하쉠의 친절과 지식의 길을 계속 이어갈 진정한 영적 동반자를 찾아주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믿음직한 종 엘리에제르를 그 임무를 위해 보낼 준비를 하는 것에서 우리는 즉각적인 신성한 성공에 대한 축복을 받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24:1은 ‘아브라함이 날들이 와 늙었고 하쉠께서 아브라함을 모든 것에 축복해 주셨다.’라고 알려주는데, 토라가 여기서 늙음으로 묘사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본질에는 그의 개인적인 노년의 도래라는 보편적인 개념과 연결된 무언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방법에서, 그것은 ‘늙음’의 비밀의 핵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미드라쉬는 그 구절에 초점을 맞추어 아브라함이 늙은 첫 번째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수수께끼 같은 가르침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아브라함 이전에는 눈에 보이는 노화 같은 것이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경험한 최초의 사람이었는데, 아브라함은 하쉠께 기도하여 ‘젊음과 늙음’을 구별할 수 있게 할 것을 요청했었습니다.

미드라쉬의 언어는 다음과 같습니다만, 미드라쉬는 시적 은유를 사용하며 문자 그대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이 없다는 점을 함께 참고하면서 명심해 보세요.


그때까지 남녀노소, 부모와 자식은 똑같아 보였는데, 아브라함은 이쯔학크와 외모가 똑같았었습니다.

이로 인해 혼란이 생겼고, 아브라함은 하쉠께 그의 자비로 그 상황을 바꿀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하쉠께선 아브라함에게 그가 잘 물었다고 답하셨습니다.

‘내가 너로부터 (그렇게) 할 것이다.’

따라서 미드라쉬는 그가 하쉠께서 늙음을 부여한 첫 번째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미드라쉬는 베레쉬트의 처음부터 그 때까지 늙음이 없었다고 말을 맺었고, 하쉠께선 ‘아브라함이 날들이 와 늙었다’라는 구절을 통해서 표시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가르침은 정확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해 당혹스럽습니다.

우리는 ‘늙음’이 이 구절 이전에 토라에서 확실히 언급되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파라샤트 바예라 부분의 19:4에선 쓰돔(소돔)의 악한 시민들에게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쓰돔 사람들이 젊은이부터 노인까지 그 온 시민이’... 그리고 또한 다른 예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분명히 사람들도 아브라함보다 먼저 늙었지만, 유대 현인들은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식별할 수 있는’ 늙음에 대해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했고, 그 후 하쉠께서 그분의 메리트로 그것을 제도화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자 이제 마음을 열어보세요.

이것은 이미 세상에 있었던 ‘노년’에 대한 단순한 이해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늙음은, 흰머리로 알아볼 수 있게 취득 된 지크나(זיקנה)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 세상에 없던 일이었고, 아브라함은 이것을 위해 노년의 진정한 의미가 인식되도록 하쉠의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라브 마하랄은 ‘노년’에 대한 토라의 사상이 이해와 지혜를 얻은 자와 동일시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때까지의 세대는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 인식이 진정한 지혜의 근원이었지만,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전 세대의 이해와 지혜는 미성숙한 상태로 정지되었었습니다.

그것을 ‘정지된 발달’이라 부릅니다.

사람들은 물론 아브라함과 싸라보다 먼저 늙었었지만, 토라의 메시지는 그들이 ‘노년의 면류관’인 지크나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전합니다.


아브라함의 사명은 사람이 ‘미성숙의 제약’에서 벗어나 ‘노년의 완성’으로 대표되는, 나이와 함께 참되고 지속적인 지능의 수준으로 올라가게 하기 위해 세상이 창조주를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창조주에 대한 지식을 퍼뜨림으로 아브라함은 참된 지성을 세상에 물려주었고, 이것이 모든 인류를 위해 영원하고 견고하길 기도했습니다.

미드라쉬가 설명했듯, 그는 노년의 지크나 적인 ‘눈에 띄는 구별’이 있어야 지성이 성숙함을 따라 사람이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라 요청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쉠에 대한 지식이 ‘모든 인류를 위한 유산’으로 대대로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성취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가르침들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한 번 깊이 열어보세요. 그러면서 동시에 트힐림(시편) 103:5에 반영된 것처럼 노년의 아브라함과 싸라에겐 젊음을 유지하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좋은 것으로 너를 충분히 만족케 하시니 네 젊음이 독수리처럼 새롭게 되리라.’


아브라함과 싸라는 젊음과 늙음이 동시에 존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 난해해 보이는 이분법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가르침을 통해 아름답게 묘사되며, 해결책을 제시해 줍니다:

탈무드와 미드라쉬는 아브라함이 동전을 주조했었다고 전합니다.

그의 동전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한쪽에는 노부부가,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어린 소년 소녀가 그려져 있다고 전합니다.

그럼 이 늙음과 젊음이라는 동전의 양면이 상징하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라쉬는 노부부가 아브라함과 싸라를, 그리고 반대편의 젊은이들은 이쯔학크와 리브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동전은 영적 유산의 역할을 다음 세대로 넘겨준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마음을 더 깊이 열어 보세요, 다른 위대한 현인들은 이 양면이 모두 아브라함과 싸라를 대표한다는 생각을 표명했습니다.

한쪽에는 노년의 아브라함과 싸라가,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젊은 시절의 아브라함과 싸라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단순한 수준에선, 이것은 그들의 젊음이 그들에게 돌아왔다라는 생각을 전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그들이 노년기에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출산은 일반적으로 젊은 층에게만 경험되는데, 그들은 함께 아이를 낳았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 정부 주화 및 메달 공사는 이 미드라쉬에 설명된 주화를 기반으로 동전을 발행하기로 결정했고, 2006년에 청동으로 된 아브라함과 싸라 기념 주화를 주조하여 구입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기념 주화는 공사 홈페이지에서 ‘한쪽에는 노부부를, 다른 한 쪽에는 소년과 소녀를’이라는 문구를 새겼음을 볼 수 있으며, ‘이 동전은 그러한 연로한 부부에게서 이쯔학크가 태어난 기적을 상징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스라엘 정부 주화 및 메달 공사와 같이 이 전통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학자들의 의견도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전 세계 주화 수집가들과 관련해서도 이것이 화폐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집니다.


미드라쉬에 있는 현명하고 거룩한 현인들의 이 가르침은 우화적이고 시적인 장치이며,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시도하면 쉽게 오역될 수 있습니다.

미드라쉬의 문자적 해석은 일반적으로 잘 끝마쳐지지 않는데, 가르침의 의도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동전에 대한 이 묘사는 그러한 아이디어가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과 그것이 전달해 줄 놀라운 개념을 암시합니다.

그게 과연 무엇일까요?


주화를 주조한다는 개념은 주권, 사회에 대한 영향력, 대중의 수용을 나타내는 강력한 사상입니다.

대중이 사용하는 통화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번 파라샤의 23:16에서 아브라함이 막흐펠라의 밭을 ‘교환 가능한 통화’로 구입했음을 봅니다.

모든 왕들은 자신의 동전을 발행하는데, 무수한 영혼의 삶에 영향을 준 이타심과 가르침, 지혜와 지도력을 갖춘 아브라함과 싸라는 현인들의 ‘신성한 임재의 날개 아래’라는 표현대로 사람들을 우상 숭배로부터 구출하여 하쉠께로 데려온 많은 이들로부터 ‘왕족’처럼 여겨졌습니다.


왕족이란 측면은 이번주 파라샤의 처음 부분인 5절과 6절에 아브라함이 싸라를 위한 매장지를 요청했을 때 문자 그대로 표현됩니다: ‘헤트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그에게 이르길, ‘주인님, 우리를 들어주십시오. 당신께선 우리 가운데서 엘로킴의 지도자이십니다.’

따라서 우화적으로도 아브라함이 동전을 주조했다는 얘기는 참으로 적절합니다.

아브라함은 ‘광대한 영역의 주권자’로 선포된 왕은 아니었지만, 그의 생애에 이미 모든 이들이 인정한 전례 없는 영적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어렸을 때 그리스 철학자들에 대해 배워왔습니다.

시노페의 디오게네스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디오게네스에 대한 전설의 주요 출처는 서기 3세기로마의 학자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로, 디오게네스에 대한 많은 이야기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른 인물에 대한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그렇기에 역사가들은 디오게네스에 대한 대부분의 일화가 허구라고 기록합니다.

저는 이 특정한 일화가 우리를 계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이야기에서 디오게네스는 그리스 화폐를 훼손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어 위조죄로 체포됩니다.


이 이야기는 델픽 신탁에게 이 사기를 계속 행할 지에 대한 조언을 구한 후 그렇게 하도록 격려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디오게네스는 신탁이 ‘주화’와 ‘관습’을 의미하는 모호한 표현을 토대로 그리스의 관습을 바꾸라고 조언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나중에 이 델픽의 말은 그리스 철학의 시노페 분파의 슬로건으로 채택되어 ‘통화 변경’, 또는 ‘가치 재평가’로 번역됩니다.


바로 여기에 ‘아브라함 동전’의 진정한 비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주화 주조에 뿌리를 둔 현인들의 뛰어난 이해에 대한 고대 모티브는 ‘사회의 가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싸라는 함께 그 사회에 가능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바로 ‘창조주가 있다는 지식’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가치’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으며, 그들의 ‘통화’를 변경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깊이 열어보세요, 왜냐하면 가장 깊은 진실은 동전의 양면이 아브라함과 싸라를 묘사한다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과 싸라에게선 그 양면이 하나로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그들의 늙음은 젊음과 연결되는 다리였습니다.

젊음의 특징은 설렘과 에너지와 긍정적 변화, 혁명을 이끄는 힘에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안정과 함께 이성적으로 계산된 소리가 나오게 되며, 습득한 지혜는 겸손으로 이어지고 지적 성숙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간다는 걸 힘겨워하는데, 그것을 축하하는 이는 거의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애써 부정하거나 위장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싸라는 노년의 좋음과 젊음의 좋음을 융합 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젊음의 이상주의와 노년의 지혜를 결합했고, 나이가 들수록 젊어지며, 독수리처럼 새롭게 되었습니다.

또한 밥 딜런이 1964년 그의 노래 ‘My back pages’에서 ‘아, 나는 몹시 나이가 들었지만 지금이 그때보다 젊다네’라고 노래한 것처럼 되었습니다.


실로, 이 최초의 유대 부부는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유명한 스페인 탐험가 후안 폰세 드 레옹은 플로리다에서 전설적인 ‘젊음의 샘’을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현인들은 아브라함과 싸라가 진정으로 영원한 젊음의 비결과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을 나타냈다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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