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우리는 이번 주에 바이크라(레위기)의 마지막 두 부분인 베하르와 벡후코타이를 읽음으로 토라 읽기 주기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벡후코타이의 결론 부분은 하쉠께서 약속하신 그분의 언약에 따라 살 결과가 되는 13개의 아름다운 축복 구절로 시작되는데, 이들은 간결한 구절로서 실제로 삶의 가장 큰 축복을 이루는 목가적 비전을 표현합니다: 바로 생계와 풍요, 평화와 안전, 영적 성취에 대한 신성한 보증 등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축복의 구절들 뒤에는 훈계의 구절인 ‘톡하하’로 알려진 29개의 구절이 이어지는데, 이것은 토라가 ‘점진적인 도덕적 쇠퇴’의 다섯 주기를 설명하는 무서운 경고이며, 각 주기는 이스라엘이 그분의 계명을 따르지 않을 시 찾아오게 될 형벌들로 신성한 응답들을 촉발시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완고함과 부정함의 정도에 비례해 강도가 점점 높아지죠.
이 구절들에 묘사된 적나라한 현실은 고통, 예속, 두려움, 혐오감, 불안함, 무기력함, 황폐함이라는 살아있는 악몽들을 제시하는데, 이렇게 심화되는 보복 주기의 가장 강력한 원인은 26:21에서 처음 언급됩니다:
‘만약 너희가 나와 반대로 걸어가고 나를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나는 너희 죄들에 따라 일곱 배의 재앙을 너희에게 더할 것이다.’
하쉠께서 ‘따를’ 것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분께서 응답할 ‘그에 따를 것’은 무엇일까요?
이 ‘따름’이란 표현은 하쉠과 창조물과의 관계가 ‘그때그때의 되는대로 따르는 관계’라고 가정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하쉠께선 직접 관여하지 않으심으로, 따라서 모든 것이 ‘우연’같아 보이는 것이라는 점이지요.
그와 동시에 ‘너희가 나와 반대로 걸어가고’는 ‘너가 나에게 무관심하면’이란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어서 26:14-15에서는 이 권고의 부분을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읽힙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듣지 않고 이 모든 계명들을 행하지 않고 내 법들을 거부하고 내 법규들을 너희 자신이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들을 행하지 않고 내 언약을 너희가 깨뜨리면’
이것은 매우 장황한 서두 진술로, 그것은 모두 같은 것을 표현하는 다양한 형태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라쉬는 실제로 이 구절에 묘사된 점진적 악화의 일곱 단계를 지적하고, 그 일곱 단계는 각각 다음의 단계들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듣지 않고’
이것은 토라에 몰두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모든 계명들을 행하지 않고’로 이어지는데,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수행’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지요.
‘내 법들을 거부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한다면,
‘내 법규들을 너희 자신이 싫어하여’
자신이 배운 것을 업신여기며,
‘내 모든 계명들을’
내(하쉠)가 그들에게 명령한 자임을 부인하고,
‘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것까지 막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언약을 너희가 깨뜨리면’
그는 결국 하쉠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곱 단계에서 예견된 과정은 ‘아버지들의 가르침’들을 의미하는 피르케이 아보트 4장과 일치합니다:
‘하나의 미쯔바(계명)는 다른 미쯔바로 이어지고, 하나의 위반은 또 다른 위반으로 이어진다’
이제 여기서 마음을 열어보세요.
첫 번째 죄를 지은 사람은 첫 사람 아담이죠?
그런데 그것은 ‘한 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바(하와/이브)가 뱀과의 ‘일상적인 대화’(그 자체가 이미 은유인)로 시작된 과정의 절정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나무를 ‘만지는 것’으로 계속되었고, 결국 그녀가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는 하쉠의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끝난 것이죠.
바로 그것이 그렇게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아담과 하바의 축소판인 우리도 심각한 방식으로는 ‘즉시’ 위반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절벽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한 번에 한 단계씩, 무해해 보이는 모든 일들이 발생합니다.
악은 항상 ‘중요한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순진해 보이는 무모함의 범위 내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무모함의 범위는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면서 점점 더 넓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적대하는’ 사악한 성향인 예쩨르 하라의 자기 파괴적인 목소리입니다.
그것은 꼭 ‘미친듯이 휘둘러 대며’ 즉시 가장 심각한 죄를 범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그냥 이 작은 일을 해봐’라고 속삭입니다.
따라서 유대 현인들은 그마라 샤바트 편에서 가르치는데, ‘이것이 예쩨르 하라의 기술이다: ‘오늘은 이렇게 저렇게 하고, 내일은 조금 더 나아가서 하쉠을 부인하고 우상을 섬겨보자’라고 함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깊은 사실로, 오늘날엔 선택할 수 있는 ‘아이돌’이 너무나 많은데, 그래서 사람은 그닥 중요해 보이지 않는 작은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걱정하고 경계해야만 합니다.
실로 하나의 선행은 다른 선행으로 이어지며, 하나의 위반은 또 다른 위반을 따르기에 거룩한 경전들은 사람이 ‘첫 번째 위반’에 대해 회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일단 시작해 버리면 그 이후의 모든 것에 대해 사실상 더 이상 선택의 여지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의 자유 의지가 그에게서 뺏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선 일종의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요.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습관화하면 실제로 그 길을 계속 가도록 강요됩니다.
그의 행동 패턴이 확립된 것입니다.
개인이 자기 자신을 붙잡고 의식적으로 하쉠께로 돌아가지 않는 한 ‘지금’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희소식은, 하향 곡선이 ‘작은 것’으로 시작할 수 있듯, 돌아가는 길도 작은 선행으로 시작할 수 있고, 그것은 유대 현인들의 표현처럼 ‘위대한 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슐로모(솔로몬) 왕은 미슐레이(잠언) 28:14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요약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항상 두려워 한다’
그는 하쉠을 두려워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아주 조금이라도 조심합니다. 모든 행동 패턴이란 것이 그렇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쉠의 길을 존중하기 원하는, 하쉠에게 민감한 자는 이 세상에서 그의 발걸음을 조심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격언의 가장자리로부터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저는 우리의 소멸에 단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지만, 하쉠에 대한 이 ‘인과적인’ 태도는 어떻게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상호주의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여러분이 친절과 감사, 부정함 등 세상에 베푸는 모든 것이 결국 어떤 형태로든 여러분에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보편적인 원칙으로, 이 원칙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주변의 환경을 훨씬 넘어서는 파급 효과를 갖는다는 개념에 기반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내놓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 있으며, ‘세상’은 그 에너지를 우리에게 돌려주는 방식이 있고, 우리가 부정적이거나 이기적이거나 불친절 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해를 끼칠 부정적 에너지를 생산합니다.
이 ‘상호주의의 법칙’에 따르면, 이 부정적 에너지는 불운, 불행, 또는 건강 문제와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 원칙을 설명하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가장 인기 있는 문구 중 하나는 ‘돌아가는 것은 돌아온다’라는 것입니다.
이 문구는 우리의 행동에 결과가 있으며,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유의해야 한다는 개념을 전달해 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자비로우며 관대할 때, 우리는 결국 우리에게 돌아올 긍정적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을 낳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모두 잘 확립되어 있고 세속적인 학계에서 연구 대상과 주제가 되지만, 이 개념은 거룩한 토라에 기초한 이스라엘 현인들의 글에서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이미 표현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은 마치 그것이 ‘독립된 힘’인 것처럼 언급하는 대신 ‘세상의 창조주’로 대체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사실 토라의 사상에 이미 확고하게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결과’를 가져오는, 즉 우리 자신에게 되돌려주는 에너지의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의 위대한 작품 ‘토라의 두 석판’의 이름을 따 ‘거룩한 쎌라’로 불리는 위대한 카발리스트 라브(랍비)인 예샤야후 할레비 호로비쯔는 이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는데, 그는 ‘상위 세계는 하위 세계의 행동에 반응하고 거기에서 축복이 그것을 일으킨 자에게 퍼진다. 이 진리를 깨달은 자에게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하쉠을 섬기는 인간의 필생 사명의 본질인 것이다. 즉, 하쉠께서 잘못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적 본질이 반응하고 있다는 것으로, 창조주께서 물리적 세상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정의하는 특정한 인과관계를 세우신 것과 같이 영적/도덕적 본성도 세우신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좋은 것을 행하면 좋고 충만한 삶이 생기는 것이고, 악을 행하면 부정적 경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 따를 진노’로 묘사되는 하쉠의 반응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유대 현인들은 소위 ‘상호주의의 법칙’에서와 같이 이것이 우리와 하쉠의 상호 관계를 가리킨다고 가르칩니다.
이 상호 관계는 히브리어로 미다 케네게드 미다라고 부르는 ‘~에 따르는’이라고 알려진 개념을 기반으로 하는데, ‘측정에 따른 측정’은 진정한 세상의 법칙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받는 것, 즉 일부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는 ‘처벌’이 그것을 ‘응당한 자연 반응’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고 하겠지만 그 본질은 우리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비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다 케네게드 미다의 개념은 토라 사상의 근본적 원리이며, 하쉠의 공의가 완전하고 우리의 행위에 따라 상과 벌을 주신다는 개념에 근거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에 결과가 있고, 우리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있다는 원칙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그에 따를 진노’라는 개념은 창조주에 의해 ‘세상의 구조’에 입력되어 있는 것이 깨어남을 의미합니다.
우리 쪽에서의 무심함은 물리적 세상에서 하쉠의 존재와 상호작용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하쉠의 임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쉠과 그분의 계명을 ‘우리가 해야 하기 때문에 한다’는 의무처럼 존중, 관심, 동기부여의 부족함으로 대하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전혀 하게 하지 않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하쉠의 반응에 대한 이러한 ‘인과적 진노’의 개념은 티쿤(교정)의 원리를 반영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티쿤은 무언가를 고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세상을 고치고 바로잡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각자의 주요 임무로, 우리는 세상을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일에 대해 우리가 왜 이 시대와 이 장소에서 태어났는지, 우리가 왜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지에 대한 설명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우리 모두가 행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쉠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그분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하쉠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할 때, 우리는 세상을 파괴하고 하쉠과 인류를 분리시키는데 기여합니다.
우리는 아마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닐테고 그냥 ‘부주의했다’ 하겠지만, 결국 우리는 그냥 그에 따른 것입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쉠의 인과적인 상호성은 우리가 하쉠께 돌아가고 우리의 행동을 통해 세상을 고치도록 동기를 부여하며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에겐, 하쉠을 가볍게 대한다는 것이 피상적이고 냉담한 방식으로 하쉠과의 관계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을 위해 계명을 이행하고 선행을 할 수 있으며 친절할 수 있지만 거기엔 진정한 의도나 열정이 없을 수도 있으며 우리는 기도를 외울 수 있지만 그 내용과 실제의 연관은 없을 수 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신성함과의 연결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외우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 수 있나요?
본질적으로 무심결에 따르는 것은 우리가 진정한 마음이나 영혼 없이 우리 자신의 자아 주도적 의제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행동을 겪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칠 수 있습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티쿤과 츄바(회개)의 길은 하쉠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쉠과 연결되려는 열망을 갖고 성실함과 열정적 의도를 가져 그분과의 관계에 접근하려고 노력함으로 문제를 고칠 수 있습니다.
민족적 차원에서 티쿤과 츄바의 길은 토라의 가치와 원칙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며, 세계적 차원에서도 하쉠의 임재를 인식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류를 의미합니다.
친절과 자선을 수반하고 정의와 공의로움의 원칙에 기초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바알 쉠 토브와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현인들은 이 모든 것들을 정확히 가르쳐왔습니다.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동들은 아무리 사소하거나, 대수롭지 않아 보일지라도 우리 주변의 세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생각과 말, 행동이 모두 포함되는데, 실질적으로 하쉠과 우리의 관계와 관련해 우리가 무심코 영적 수행에 접근할 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신성한 에너지에 완전히 관여하고 있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쉠과의 연결을 약화시키고 우리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며, 이는 차례대로 세상으로부터, 즉 ‘세상의 주인’으로부터 동일한 반응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그렇게 ‘그에 따른 진노’의 반응을 의미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참여와 헌신의 부족함에 대한 신성한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로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동의 힘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의도와 초점을 지녀 영적 수행에 접근할 때, 우리는 하쉠과의 연결을 강화하고 더 큰 영적 성장과 성취를 경험하게 됩니다.
거룩한 바알 쉠 토브는 이 파라샤에 대해서 매우 심오하고 아름다운 것을 말했는데, 그는 아버지가 자녀를 벌할 때 그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자녀가 경험하는 것보다 더 크다고 가르칩니다.
말하자면 하쉠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보다 더 큰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일들과 우리가 하쉠으로부터 멀어지는 모든 비극에 대한 세상에서 가장 깊은 통찰입니다.
우리가 이 무서운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은 그분의 의지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분께선 오직 좋음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더 높은 연합으로 묶여있는 세상의 자연 법칙과, 우리가 받아들인 언약의 파기가 재앙을 초래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하게도, 시나이 산의 언약은 온 세상을 지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현인들은 또 다른 비밀을 가르치는데, ‘너희가 나를 듣지 않는다면’이란 말은 우리가 깊고 의미 있는 수준에서 하쉠과 연결하는데 실패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삶은 단순히 ‘하쉠의 계명을 따르는’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과의 친밀하고도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깊은 토라의 통찰은, 이 관계가 ‘자아의 무효화’를 의미하는 비툴(ביטול)의 개념에 기초함을 가르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쉠과 연결되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의 욕망과 자아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아주 간단한 의미로는, ‘우리의 자아’는 그 진정한 연결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훈계적 구절에 제시되는 전체적으로 끔찍한 시나리오의 결론은 하쉠과의 단절은 점점 더 나빠지고 훨씬 더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으로부터의 단절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하쉠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을 그분보다 앞에 두는 것인데, 그분의 뜻보다 우리 자신의 욕망과 필요를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하쉠의 위치에 두는 아보다 자라(우상 숭배)의 한 형태입니다.
하쉠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결과는 이번 파라샤에서 묘사된 가혹한 훈계로, 이러한 ‘저주와 고통’은 하쉠으로부터 분리되는 결과입니다. 그분의 ‘형벌’이 아닌 것입니다.
유대 현인들은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이 상황을 바로잡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하쉠과 다시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시간을 따로 떼어서 하쉠과 ‘단 둘이’ 있고, 우리 자신의 언어로 그분께 말하며,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와의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발전시키려는 개인적 목표를 설정함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과 자아를 제쳐두고 영적인 차원에서 그분과 연결하고자 노력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온 마음을 다해’ 하쉠의 뜻을 이루는 열쇠이고, 우리에게 실망한 세상의 분노를 피하게 하는 열쇠입니다.
이번 파라샤의 전체는 하쉠과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하게 일깨워주는 ‘매우 긍정적인 빛’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분의 계명을 따른다는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그분과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우리의 인생이 바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우리를 향한 하쉠의 뜻으로, 하쉠께선 우리가 단순히 파라샤에 묘사된 저주와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무한한 사랑과 친절을 나타내실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주기를 바라실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창조되었고, 모든 인류는 그것을 위해 창조 되었습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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