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이번 주 이스라엘 내에서의 토라 파라샤는 파라샤트 베하알로텍하, 그리고 이스라엘 밖의 디아스포라는 파라샤트 나쏘를 읽습니다.
파라샤트 베하알로텍하는 바미드바르(민수기) 8장에서 시작하는데, 하쉠께서 모셰에게 대제사장 아하론에게 메노라(일곱 가지로 나뉜 촛대)에 불을 붙일 것을 명령하라는 지시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메노라는 실제로 무엇에 관한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유대 현인들이 제기하는 질문들로, 그들은 왜 성전 안쪽 성소에 그런 촛대가 있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것은 하쉠께서 명령하신 것이고 그것이 성전과 그곳에서의 섬김의 본질적인 부분이죠.
그런데 ‘왜’, ‘그곳에서 무엇을 하며’, ‘그 목적인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하쉠께선 확실히 그런 빛으로 ‘보셔야 할’필요가 없죠.
게다가 메노라는 거룩한 성전에서 매일 저녁 일몰 직전, 그 어스름에 불을 붙였는데,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27:20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이쓰라엘 아들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등불을 켜기 위하여 찧은 순수한 올리브 기름을 네게 취하게 하여 항상 등잔을 켜게 하고’
유대 현인들은 ‘항상/지속적으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토라의 의도가 ‘저녁부터 아침까지’, 거기서 메노라가 ‘저녁’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저녁에 불을 붙여 아침까지 밤새도록 태우는 것입니다.
바로 그 시간에, 그리고 그것이 이 계명이 성취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성전의 메노라에 대한 놀라움을 더해주는데, 왜냐하면 성전에서의 섬김은 주로 ‘낮’에 행해지고 ‘밤’에는 활동이 없으나 메노라에 대한 섬김은 그 규칙에서 유일한 예외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한 번 열어보세요. 메노라의 빛은 평범한 빛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파장의 빛으로, 성전에서 발산되는 신성한 임재, ‘슉히나’의 빛을 퍼뜨리는 한 방편입니다.
멜락힘 상편(열왕기상) 6:4에서 우리는 슐로모(솔로몬) 왕이 ‘좁은 창’이라는 기능으로 성전을 지었음을 배웁니다.
이 ‘좁은 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느 건물의 창문과 달리 안이 좁고 밖이 넓은, 그 기능 자체가 외부의 빛을 방 안으로 들이는 일반 창문과는 같지 않은 것으로, 그 목적은 외부에다가 메노라에서 나오는 신성한 빛을 비추며 세상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메노라는 밤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세상을 위한 교정작업’인 티쿤을 일으켰습니다. 영적인 빛의 힘이란 것은 가장 어두운 때에도 빛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성한 임재의 빛은 우리 모두에게 도달하는 것이기에 바알 쉠 토브는 우리가 어둠이나 절망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메노라의 빛은 항상 우리 안에서 불타고 있는 내면의 영적인 빛을 나타내 주는 것임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메노라의 불이 성전에서 ‘밤’을 지새우듯, 우리도 또한 가장 어두운 시기에도 우리 자신의 내면의 영적인 빛에 접근해 하쉠과 영적인 유대감을 강화하고 그 빛을 사용함으로 우리를 더 밝은 미래로 인도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토라의 심오한 비밀에서, 메노라의 일곱 가지들은 두 눈과 두 귀, 두 콧구멍과 입을 나타내는 ‘사람의 일곱 구멍’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바로 이것들이 우리의 빛, 즉 우리의 영적인 문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들의 순결을 유지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빛나게 하거나 또는 어둡게도 만들 수 있는데, 메노라와 인체 사이의 이러한 연결은 우리 각자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개인적인 영적인 일, 즉 자기 자신의 정화와 하쉠과 연결하는 우리 임무에 대한 은유를 나타냅니다.
바알 쉠 토브는 또한 그 일곱 가지들이 사랑, 두려움, 연민, 인내심, 겸손함, 결속, 그리고 주권을 나타내는 ‘영혼의 7가지 속성’에 해당함을 가르쳤는데, ‘사람의 일곱 구멍’에 반영된 이런 ‘속성’은 오메르를 세는 동안에 우리가 공부했던 바들과 동일한 속성으로, 우리가 하쉠과 연결되고 그분의 빛을 세상에 가져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을 나타내 줍니다.
리아디의 라브 슈뉘어 잘만은 메노라의 일곱 가지들이 네페쉬, 루악흐, 네샤마, 하야, 옉히다 및 그 외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두 가지의 추가적 수준들을 포함하는 ‘영혼의 7수준’에 해당한다고 가르쳤는데, 그 영혼의 각 수준은 하쉠과의 더 깊은 연결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각각의 수준에 접근하려면 더 높은 수준의 영적 작업들과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결론은 ‘영적인 준수와 하쉠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는데 집중함으로, 우리가 내면의 영적인 빛에 불을 붙임으로써 그 각 영혼의 더 깊은 수준으로 접근하고 그분의 빛을 세상에 더 많이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하쉠을 섬겨야 하는 우리의 ‘아보다트 하쉠’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영적 성장과 성취를 이뤄내는 열쇠입니다.
여기서 이제 이번 파라샤의 시작 부분으로 돌아가 보면, 처음의 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쉠께서 모셰에게 말씀하셨다. 이르시기를, “아하론에게 말하여 그에게 일러라. 너가 등잔들로 오를 때 일곱 등잔들이 그 빛을 메노라의 얼굴을 향해 비추어야 한다.” 아하론이 하쉠께서 모셰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렇게 행하여 메노라 앞 그것의 등잔들을 켰다.’
여기서 유대 현인들은 ‘아하론이 하쉠께서 모셰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렇게 행하여 메노라 앞 그것의 등잔들을 켰다.’라는 이 유명한 구절에 어리둥절해 하는데, 이 구절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건 새로운 것을 추가하거나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듯 보입니다.
우리는 대제사장 아하론이 모셰의 지시대로 하쉠의 명령을 완벽히는 이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하론이 그렇게 했다’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여분의 구절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 항상 가능한 한 직설적으로 기본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려는 라쉬의 발언은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어 줍니다.
라쉬는 이 구절이 ‘변화를 주지 않은 아하론을 칭찬하고자 하는 내용’이라고 씁니다. 이건 무슨 말일까요?
이 구절은 하쉠의 지시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아하론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가 언제 그랬다는 거지요?
우리는 아하론이 많은 거룩한 계명들을 받았고, 그가 그것들을 변경하지 않았으며, 지시 받은 대로 수행했다는 여부에 대해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깊은 교훈으로, 특히 우리 모두에게 관련된 삶의 교훈으로 아하론은 매일 같은 시간에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메노라에 불을 붙였는데, ‘그가 그렇게 했다’라는 구절은 그가 처음에 느껴봤던 것과 ‘같은 열정과 흥분’으로 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매번이 처음과 같았고, 계명이 그에게는 어떤 것도 결코 오래되거나 오래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코 열정을 잃지 않았으며, 기계적으로 하는 패턴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상의 ‘단조로움’을 경험한 적이 없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 구절, ‘아하론이 그렇게 했다’라는 말이 바로 그러한 아하론을 칭찬하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라쉬가 설명했듯, 그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바이크라(레위기) 9장의 파라샤트 슈미니에서 배운 아하론 자신의 두 아들인 나다브와 아비후는 그 예와는 달리 성막 봉헌일에 하쉠의 임재에 대한 기쁨에 너무도 매혹되고 흥분해서 도를 넘어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롭고 특별하게’ 하쉠에 대한 애착을 표현해야 한다고 느낀 나머지 허락되지 않은 제물을 가져왔죠.
그러나 메노라에 대한 아하론의 행동은 그 반대였습니다.
그것은 재건하여 새롭게 개선시키는 것이었고, 원래의 흥분 수준을 계속해서 지속시키며, 그것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상적이고 정기적인 작업이었지만, 그는 그것이 일상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매일 새로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깊은 차원에서, 메노라 계명을 섬기는 동안 ‘어떤 것도 변경하지 않고 하쉠의 계명을 따르겠다’라는 아하론의 흔들리지 않는 헌신은, 자아에 의해 야기된 일탈이나 타협 없이 하쉠의 계명만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하쉠의 뜻에 대한 한 사람의 완전한 항복의 이상적인 모습을 나타내 주는데, 이를 위해선 하쉠에 대한 깊은 신뢰와 그분을 온전히 섬기고자 자신의 욕망과 의견을 포기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코츠크의 위대한 라브 메낙헴 멘델은 아무것도 변경하지 않고 하쉠의 계명을 따르겠다는 아하론의 확고한 헌신에 대한 라쉬의 진술이 우리의 영적 추구에 있어서도 일관성의 중요성을 일깨운다고 가르치는데, 그는 아하론이 메노라 계명을 행하면서 어떤 것도 바꾸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목표도 도전이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일에 직면했을 때 우리 자신의 영적인 노력에서 ‘일관성 있는 흥분’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도전이고, 우리의 섬김이며, 이 세상에서 하쉠을 섬기는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메노라의 빛이란 것은 유대 현인들의 말에 따르면 ‘매일 당신의 눈에 새로워야 하는 것’으로, 어떤 하루도 이전과 같지 않도록 우리는 매일 다시 불을 붙이고 힘을 끌어내며 우리의 영혼을 통해 흐르는 신성한 빛을 ‘우리의 일곱 수준’의 등불을 통해 비춰 우리의 모든 행동에 힘과 방향성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메노라처럼 빛과 긍정을 세상에 퍼뜨리고, 어둠과 부정함 앞에서도 ‘좋은 것’을 세상에 가져오려고 노력하며, 끊임없이 에너지를 새롭게 하고 하쉠의 빛을 담아 나누는 그릇이 될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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