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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Adam Lee

파라샤트 발락 5783 '빌암이 주는 교훈'

샬롬, 이스라엘 땅에서 이번 안식일 토라 읽기는 파라샤트 발락이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두 개의 파라샤인 후카트와 발락을 같이 읽게 됩니다. 이 다중 읽기를 통해 유대 공동체 모두는 이번 주에 다시 연합하게 되며, 샤부오트를 이틀 간 준수하는 디아스포라 공동체로 인한 읽기 차이를 이번에 보완하게 됩니다.


파라샤트 발락은 바미드바르(민수기) 22:2에서 시작되는데, 파라샤가 시작되는 처음 부분에서 모아브(모압)의 왕인 찌포르의 아들 발락은 창조주께서 약속하신 땅에 곧 들어갈 준비를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존재에 몹시 동요하고, 미드얀의 장로들과 의논해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하고자 브오르의 아들 빌암(발람)이라는 자를 고용하려 합니다.

‘보시오, 한 백성이 미쯔라임(이집트)으로부터 나왔소. 보시오! 땅의 표면을 덮고 내 맞은편에 머물고 있소이다. 이들이 나보다 강하니 지금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해주오. 아마도 내가 칠 수 있어서 땅으로부터 그들을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당신이 축복하면 축복을 받고 당신이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걸 내가 알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아브 왕 발락이나 그의 백성들에게 무슨 일로 분노를 일으켰을까요? 아무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자손이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는 건 인류를 위한 희망과 구속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으로부터 하쉠의 임재를 숨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발락과 같은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이 그것을 드러내려 하는 책임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조직적 ‘조약’에 문제를 일으켜 발락은 그의 말처럼 ‘그들을 쳐서 땅에서 쫓아내고자’합니다.


이번 주에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읽을 파라샤트 후카트와 발락의 함께 읽기는 ‘모셰와 빌암’이라는 동시대 두 인물 사이의 강한 대조에 그 초점을 맞춥니다.

파라샤트 후카트는 바미드바르 19장에서 붉은 암소의 아리송한 법령으로 시작되고 모셰는 그런 붉은 암소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붉은 암소의 재는 하쉠께서 이스라엘에 정결함을 가져오는 데 사용하라고 명령하셨죠.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으로는 정결함의 비밀이 ‘완벽한 겸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쉠께서 바미드바르 12장에서 증거하셨듯, 모셰는 땅에서 가장 겸손한 자고 그분의 온 집안 중에서 완전히 믿음직한 자였습니다.

모셰에겐 자만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이 그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비밀을 간직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토라는 하쉠께서 빌암이 큰 예언자가 되도록 허락하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빌암은 자신의 에너지를 악으로 향하게 해서 불결한 힘을 휘두르는 주술사가 됩니다.

하쉠께선 분명 그에게 위대한 예언의 은사를 주셨고, 그에게 위대한 사람이 될 잠재력을 주셨죠.

하쉠께선 그를 시험하고자 이런 기회를 주셨고, 빌암은 세상의 유익을 위해 그의 은사를 사용해 민족들을 하쉠께서 되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쉠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고, 하쉠을 자신의 개인적인 ‘행운의 부적’같이 취급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빌암과 모셰는 정반대였고, 그것은 코헬레트(전도서) 7:14에 반영된 비밀이었습니다:

‘하쉠께선 하나를 다른 하나에 상응하게 만드셨다.’


이 구절에 대한 더 깊은 이해는, 슐로모(솔로몬) 왕이 지혜롭게 우리의 겹겹이 쌓인 현실 안에 존재하는 ‘반대의 영역’을 언급한다는 겁니다.

하쉠의 창조물 그 모든 것에는 상응하는 반대가 있습니다. 하나의 존재를 찾으면 다른 하나에서 그에 상응하는 것을 찾을 수 있죠. 그것은 현실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실제로 하쉠에 대한 빌암의 인식은 모셰의 이면이었습니다. 모셰와 빌암은 서로 반대되는 존재였죠.

그럼에도 빌암은 하쉠의 슉히나의 영광을 인식할 수 있었으며, 하쉠께서 그와 말씀하시는 때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는 마음대로 하쉠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열어보세요.

히브리어로 ‘이상한 것을 섬기는 행위’를 아보다 자라라고 부르는데, 아보다 자라, 다른 말로 ‘우상 숭배’의 행위는 하쉠을 ‘낯선 이’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빌암과 하쉠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설명인가요?

빌암은 하쉠을 ‘낯선 이’처럼 대했고, 그분으로부터도 ‘낯선 이’ 취급을 받았습니다.


하쉠께선 대낮에 모셰와 ‘얼굴을 맞대고 친구처럼’ 말씀하셨지만, 빌암은 한밤 중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은밀히 하쉠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쉠께서 밤에 빌암에게 오셔서 그에게 말씀하셨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 현인들이 말했듯이, ‘하쉠께서 마치 빌암과 함께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셔서, 달리 말하면 ‘불미스러운 만남’처럼 어둠 속에서’ 그에게 오셨습니다.


가장 큰 비극은 자신의 잠재력에 부응하지 못할 때입니다.

하쉠께선 우리 각자에게 그분과 가까워질 수 있는 잠재력과, 어느정도 위대해질 수 있는 잠재력을 위해 축복해 주셨습니다.

유대 현인들은 하쉠께선 사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 판단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하쉠께선 ‘너는 왜 이렇게 저렇게 하지 않았느냐’라고 묻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선 ‘너는 왜 너가 되어야 할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래서 빌암이 자신의 잠재력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은 비극적인 아이러니였습니다.

그러나 하쉠께선 그분의 창조물이 그분에게 반역하기로 선택할 때에도 오래 참으시며 자비로우시고 동정심을 베푸십니다.

그렇기에 놀라운 점은 빌암이 마음대로 악에 빠져 도덕적으로 타락해도 하쉠께선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수없이 주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쉠께서 빌암이 모아브의 고관들과 함께 갔기에, 그리고 하쉠께서 빌암이 그렇게 열심으로 가고자 하는 것을 보시고 그를 방해하고자 하쉠의 천사가 길 위에 있음을 알게 하신 것으로 빌암에게 진노하셨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빌암은 하쉠께서 그의 눈을 열어 주실때까지 천사를 볼 수 없었으나 그의 암나귀는 하쉠의 천사가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이 천사는 누구였을까요?


이건 참으로 좋은 질문입니다. 아주 많은 천사들이 있죠.

그렇다면 그는 어떤 종류의 천사였을까요?


라쉬는 그가 빌암이 길을 잃지 않도록 죄 지음을 막고자 보내진 ‘자비의 천사’라는 유대 현인들의 미드라쉬를 인용하며 다른 말로 빌암이 하쉠의 백성을 저주하러 가는 와중에도 하쉠께선 그에게 ‘탈출구’를 주려고 하심을 언급합니다.


빌암이 당나귀와 대화하는 이 전례 없는 기적은 그가 자기파괴적인 길을 계속해서 가려는 것을 막기 위해 신성하게 조정된 시도였습니다.

당나귀는 빌암 내면에서 깨어난 신성한 불꽃을 나타내며, 그를 부정적인 의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시도합니다.

그리고 더 깊은 수준에서, 당나귀의 말하는 능력은 빌암의 의식이 일시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상징하면서, 그가 올바른 선택을 할 경우 개인적 변화의 가능성이 있음을 강조해 줍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 여기에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발락이 빌암을 고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예언력의 한 가지 독특한 측면에서, 빌암이 심지어 모셰를 능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쉠께서 분노하는 정확한 순간을 측정하는 방법을 아는 유일한 인간이었습니다.

이게 대체 다 무엇일까요?


유대 현인들은 매일 매우 짧은 시간 동안 하쉠께서 화를 내심을 가르칩니다.

자, 일단 긴장하지 말고 들어보세요.

그 시간은 물리학에서 ‘플랑크 시간’이라고 부르는 값보다도 작은 극소량의 작은 찰나로, 이 값은 우리가 현재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의 분할보다 더 작은 계산으로, 빌암을 제외하고 모든 인간이 결코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빌암은 정말로 하쉠의 분노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거래 수완과 그의 명성이 악한 지도자들 사이에 인기있을 수 있던 원인이었는데, 그것은 빌암같이 저주의 힘을 가진 자가 ‘신이 분노하는 정확한 순간’이라는 헤아릴 수도 없는 짧은 순간에 저주를 내뱉어 하쉠의 분노와 그의 말과 의도를 일치시킬 수 있다면 그 저주가 이루어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쉠께서 때때로 인간에게 실망하심과 이 세상에서 악을 행할 인간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하쉠께선 ‘분노의 하쉠’이 아닌데, 이것은 어쩌면 왜 그러한 순간이 그렇게 극소량으로 알 수 없을 정도로 짧아야 하는 지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겁니다.


하쉠께선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자 오직 ‘좋은 것’을 주려 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하쉠께선 ‘좋음’을 보십니다.

그분의 관점은 그분께서 나쁜 것을 보도록 ‘허용하는’ 가장 짧은 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하루 종일 압도적인 긍정적 관점을 가집니다.


그분께선 항상 자비와 동정으로 세상과 그분의 창조물을 호의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하쉠을 화나게 만드는 것은 아보다 자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거짓 신들을 만듭니다.


유대 현인들이 우리에게 매일 한 순간씩 있다는 비밀을 가르쳐 주는데, 바로 하쉠께서 그것(아보다 자라)을 보고 화를 낼 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트힐림(시편) 30:6의 비밀입니다:

‘이는 그가 잠시만 노하시나 그의 원하심은 생명이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평화로운 진영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곳에서 그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빌암은 발락에게 일곱 제단을 쌓고 일곱 수소를 바칠 것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바친다는 건가요? 분노의 하쉠인가요?

이 경건하기까지 한 준비의 모티브는 무엇일까요? 빌암이 하쉠의 영감을 받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빌암이 자신이 잘 안다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하쉠을 공경하고자 함일까요? 또는 빌암이 단순히 하쉠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의 요구를 따르도록 함일까요?


가장 깊은 진실은, 빌암의 제물은 싸구려 요술 행위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설에나 나오는 램프 속의 지니처럼, 빌암은 하쉠을 그의 섬김을 통해 강요하고자 희망했습니다. 이 제물들로 그는 ‘분노의 신’을 그의 대의에 동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빌암은 ‘거꾸로 가는 세상’의 예언자였으며, 하쉠에 대한 그의 관점은 부정적인 이미지와 반전된 현실이었습니다.


마음을 열어보세요.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하쉠의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에 대해, 빌암은 세상의 기둥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행해진 모든 좋은 일을 취소하는 것이죠.


일곱 명의 의인들이 일곱 제단을 쌓았었고, 그들의 제물이 하쉠께 받아들여졌으며, 그들이 좋음을 위해 세상을 바꾸었었는데:

그들은 아담, 헤벨(아벨), 노악흐(노아), 아브라함, 이쯔학크(이삭), 야아코브, 모셰였습니다.


빌암의 일곱 제단은 그 앞선 일곱 제단들과 일치하는, 아니 ‘반대되는’ 것들이었죠.

빌암은 그 의로운 자들이 성취한 긍정적 에너지를 전환시켜 자신이 가진 부정적인 면으로 에너지를 끌어옴으로 하쉠의 손이 그의 뜻을 행하도록 강요합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 7은 자연적인 물질 세계를, 즉 인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실제로 현실이 우리의 감각이 인식하는 것에서 제한되어 있다는 환상인데, 그것은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이며, 우리가 힘을 통제하고 정복할 수 있고, 우리가 우리의 명령을 수행하고자 조작할 수 있다는 환상이며, 하쉠 자신을 물질적인 세계에서 제한할 수 있고 억제할 수 있는 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빌암은 하쉠을 자연계에만 나타나는 분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제물을 통해 그 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 신이 그분의 자녀라는 이들에게 저주를 내리도록 허락할 정도로 화를 낼 특별한 순간이 도래할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빌암은 때가 되면 저주를 현실로 바꾸는 일을 할 것이었죠.


발락은 이스라엘 진영을 더 잘 살펴보려고 빌암을 다른 유리한 고지로 계속 이동시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다른 시야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였습니다.

24:15에서 우리는 빌암이 ‘슈툼 하아인’, 즉 ‘눈이 열린 남자’라고 불림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단 하나의 눈을 떴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 하나는 닫혀 있었다는 건데,

표면적으로 이 말은 빌암이 한쪽 눈만 가졌다는 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말이 전하는 비밀은 빌암이 ‘악한 눈’을 가졌다는 것이며, 그는 ‘분노’를 통해서만 하쉠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미지를 얻어내려는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발락과 빌암은 여전히 자기들이 ‘구매해서’ 조종할 수 있다는, 신에 대한 이교적 인식에 갇힌 채 ‘신이 빌암의 저주를 허락할 정도로 화가 났을 때’ 적절한 순간, 적절한 장소에 있는게 문제일 뿐이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자녀들 위에 떨어지게 하라’는 것은 작동하지 않았죠.


발락은 빌암을 세 번 다른 산당으로 데려갔는데, 그는 먼저 그를 ‘바알 산당’으로 데려갔고, 거기서 백성의 끝까지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 다음 그는 그를 ‘조망하는 들판’으로 데려간 후 그를 황무지가 내려다 보이는 높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그러나 하쉠께선 빌암의 입에 말씀을 넣어 그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줍니다.

그 말씀들이 무엇이었을까요?


거룩한 바알 쉠 토브는 말씀이 ‘살아있는’ 것으로, 말에는 영이 있고 그 자체의 세계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실 신성한 임재인 슉히나는 ‘말씀’ 안에 있으며, 빌암이 아직 그의 말을 그의 입에 둘 때도 그의 말을 압도하면서 입모양을 구부린 것도 슉히나였습니다.

인간에 관한 모든 것처럼, 말에는 기분을 좋게 해주거나 해를 끼치는 힘이 있습니다.

빌암은 반대편인 파멸과 절망, 시기와 탐욕, 그리고 무엇보다 ‘분노’의편이었습니다.


올바른 말에 관한 토라의 많은 복잡한 법들과 부적절한 모든 형태의 말에 대한 엄격한 금지는, 말의 힘과 의미라는 것에 대한 강한 예로서, 빌암의 말의 힘을 왜곡시키려는 시도와 학대를 강조합니다.


하쉠께선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니...그러자 그대로 되었다.’


트힐림 33편은 베레쉬트(창세기) 이야기와 관련해 유대 현인들이 피르케이 아보트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열 가지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심’을 우리에게 말해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빌암은 자신의 자산을 이용해 이스라엘을 대적하려 했습니다.

거룩함과 기도, 토라 공부에 사용된 말의 힘은 토라가 베레쉬트에서 우리에게 말하듯 그것이 이스라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소리는 야아코브의 소리인데 손들은 에싸브의 손들이구나.’


빌암의 교훈은 또한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하쉠은 무엇인가?’를 안겨줍니다.

하쉠에 대한 당신의 인식은 어떠한가요?

빌암의 이교도적이고 분열된 사고방식은 하쉠을 ‘잔인하고 위협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는 하쉠의 개념 자체를 타락시켰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죽음과 운명의 신인 ‘분노의 신’을 숭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쉠께선 그분의 모든 창조물에 완전한 자비를 가지는 주인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목표란 무엇일까요?

토라는 우리에게 지시하길:

하쉠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당신의 모든 길에서 그를 알고, 그분의 속성을 모방하며, 친절의 행위로 세상을 축복과 빛으로 채우고, 동료를 자신처럼 사랑하며,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만족할 줄 모르는 자신을 채우고자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고, 좋은 눈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이 깨달은 인간 존재를 위한 토라의 지침들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하쉠의 말씀에 따라 사는 도덕적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함으로 우리는 그분께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것이 ‘토라에 기초한’삶의 목표입니다.


토라는 사람이 하쉠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함을 가르칩니다.

그는 하쉠의 뜻을 우리의 뜻에 맞게 조작하려고 시도함으로 하쉠과 가까워지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노력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을 고치고 세상을 고치고자 자신의 몫을 다하는 데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의 행실이 어떠한지, 그가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지, 그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배려하는지, 이것이 하쉠을 섬기는 방법인지...이 모든 것들은 하쉠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완벽하고 신성한 섭리 안에서, 우리는 이번 타무즈 월 동안의 토라 파랴샤들을 읽었는데, 그것들은 우리의 비전을 바로잡고 모든 것에서 좋은 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쉠 자신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모셰가 드바림(신명기) 23에서 요약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쉠, 네 엘로킴께서 빌암을 들으려 하지 않으시고 하쉠, 네 엘로킴께서 너를 위해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 주셨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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