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이번 주 토라 부분은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21장에서 시작되는 파라샤트 미슈파팀입니다.
지난 번 파라샤트 이트로에서는 시나이 산에서의 높은 영적 계시로 발현된 ‘토라를 주심’에 대한 강력한 경험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법들’, ‘규례들’을 의미하는 이번 주 미슈파팀 부분에서, 우리는 여전히 시나이 산자락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부분은 우리가 지난 주에 배운 모든 것의 직접적인 연속이 됩니다.
그래서 이 파라샤는 ‘그리고 이것들이’를 의미하는 베엘레(ואלא)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너가 그들 앞에 둘 법규들이다.’
라쉬는 기록 토라에서 ‘그리고 이것들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모든 곳들은 이전에 언급된 내용에 추가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의 용법은 열 가지의 말들(십계명)이 시나이 산에서 주어진 것처럼 이 모든 법규도 시나이 산에서 주어졌다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하쉠께서 시나이 산에서 토라를 주셨을 때(또는 우리가 지적했듯 여전히 토라를 주실 때) 온 민족이 어떻게 하쉠의 음성을 듣고 뿔나팔 소리와 천둥 번개, 그리고 불과 연기로 뒤덮인 산을 보았는지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곳에서 모든 사람은 집단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예언적 통찰에 올라섰고, 하쉠의 절대적인 유일성을 인지했죠.
그런데 이제 이번 주에 우리는 인간과 창조주와의 관계 뿐 아니라 매우 일상적인 인간의 상호 작용에서 많은 예시로 인식되는 핵심적 세부 사항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관심을 돌려봅니다.
그러한 점에서 지난 번에 ‘아녹히; 나는 하쉠, 너희의 엘로킴이다’라고 선언하는 하쉠의 소리가 들렸을 때, 겉보기와는 다른 ‘세속적’인 하쉠의 계시에 대한 설명은 그 파라샤를 실망스럽게 보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쩌라는 걸까요? 그 다음에 올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그 세부 사항에 대한 관심을 얘기해 보는 것이어야 할 겁니다.
파라샤트 미슈파팀은 이 물리적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브리(히브리) 노예에 대한 법으로 시작해 많은 주제로 계속 이어지는데,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개인, 금전적 손해배상, 다른 사람을 들이받은 소, 타인의 재산에 대한 보호나 손해, 이자의 금지, 분실물의 반환, 적에 대한 구제, 거짓으로부터의 거리 두기 등이 그것입니다.
이 파라샤는 토라의 613계명 중 53개를 특정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가르침이 끝나고, 이번 파라샤는 모셰가 산 위로 올라가는 시나이 산 계시의 장면으로 결론 짓습니다. 해서 이 상세한 법규들의 파라샤는 시나이 산에서 토라를 발표하는 중간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배치는 이런 법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토라의 방식이죠.
우리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자 마음을 깊이 열어보아야 합니다.
이 모든 상세하고 다양한 계명들은 단순히 열 가지의 말들처럼 거룩한 것이라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더 높고 거룩하다는 메시지를 지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위대한 하쉠의 빛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이 세상을 위해 신성하게 설계된 이 세부적인 계명들, 바로 이 특정 계명들의 깊이를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그리고 이 세상을 위하여서 처음에 토라가 주어진 이유입니다.
이 계명들은 이 세상에 뿌리를 둔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가르쳐주면서도, 창조주와 연결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케 합니다. 영적인 것과 모든 것의 내적 본질에 연결된 상태를 유지시키는 겁니다.
드바림(신명기) 11:22에서는 인간 존재에 대한 하쉠의 계명의 목적이 창조주를 붙드는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만약 너희가 내가 너희에게 행하라고 명령하는 이 모든 명령들을 지키고 하쉠, 너희 엘로킴을 사랑하여 그의 모든 길들로 걸어가고 그에게 붙어 있으면’
그런데 우리는 이 제한적인 물리적 세상에서 우리처럼 깊이 관여하시는 무한하신 창조주에게 어떻게 붙어야 한다는 걸까요?
우리의 혼란스럽고 기만적인 현실로 인한 가려짐 속에서 창조주를 어떻게 기억한다는 것입니까?
파라샤트 미슈파팀은 우리가 인간의 모든 문제들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도 언제 어디서나/모든 상황에서 세상의 창조주께 매달리도록 돕고자 의도된, 하쉠에 의해 신성하게 설계된 세상의 법 체계를 소개해 줍니다.
미슈파팀의 법규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직면하는지에 대해서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을 하쉠의 현실과 연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들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들에서 잠시 멈춰 “하쉠께선 우리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실까?”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생각 자체가 하쉠과 소통하고 그분에게 매달리는 행위로, 사람들로 붐비는 장터 한 복판이든, 장사를 하는 자리에서든, 그 순간에도 하쉠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우리의 삶 속에 하쉠의 성품이 계속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분께서 ‘나는 하쉠, 너희의 엘로킴이다’라고 시나이 산에서 선언하셨을 때 분명히 나타난 것처럼, 시나이 산의 계시는 세상의 창조에 대한 속편입니다. 그것은 창조의 확인과 검증이었습니다.
토라의 법치 과정, 인간의 법정에서의 토라법의 의로움, 겸손과 순결은 유대 현인들이 가르치는 시나이에서의 많은 내용입니다.
‘토라의 가장 깊은 진리를 규명하고자 노력하는 이는 누구든 세상을 창조하신 거룩하고 복되신 분의 파트너가 된다.’
유대 현인들은 세 명의 재판관이 함께 앉아 토라법을 결정지을 때 ‘신성한 임재’, 즉 슉히나가 그들과 함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적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 내려진 판결에서는 그 지성의 결과가 자아, 또는 잘못된 교리나 정치적 및 개인적 고려 사항 등 기타 여러 문제로 인해 결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의도가 좋은 경우에도 뭔가 중대한 실수를 범할 수도 있죠.
그러나 하쉠의 법에 근거하는 결정을 추구할 때는 진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세 명의 토라 재판관의 결정은 말 그대로 슉히나 자체의 표현이며, 이는 하늘의 뜻에 대한 계시로서 그들의 판결과 일치됩니다.
우리는 진정한 정의의 영적 수준, 즉 토라법의 신성한 비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토라법과 사람이 만든 법 체계 사이에는 단지 차이점 뿐 아니라 깊은 간극이 있습니다.
다른 민족들의 법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 또는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인간의 지적 이해’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번 진정한 정의와 반대되는 의제와 고려 사항에 의해서 착색되고 영향을 받죠.
코헬레트(전도서) 3:16은 소름 돋는 문구로 그 점을 전달합니다: ‘내가 또 해 아래에서 공의의 자리에 악이 있고, 의의 자리에 악이 있음을 보고’
토라의 법들은 모두 시나이 산에서 주어졌고, 그 신성한 계시로부터 모셰를 통해 이스라엘로 직접 전달되었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토라의 몸’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대를 거듭하며 정통 라브 법원인 베이트 딘에서 토라의 선례와 원칙에 따라 내린 모든 결정은 토라의 일부가 되어주는데, 구전 토라의 지속적인 과정의 일부로 그것이 밝혀집니다. 그것은 시나이 산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번 토라 파라샤는 실제로 다음 주에 있을 아다르 월이라는 새로운 달로 이어질 때 항상 읽습니다.
각 유대력 달에는 고유한 본질이 있고 특별한 에너지를 전할 뿐 아니라, 개인의 성장을 위한 고유한 도전과 기회를 제시한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가오는 아다르 달에 대해 유대 현인들이 공유하는 많은 비밀 중 하나는 알레프(א), 달레트(ד), 레쉬(ר)라는 아다르의 구성 문자가 ‘알레프 다르(א דר)’, 즉 ‘한 분의 거할 곳’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알레프는 하나를, 그리고 다르는 ‘거하다’를 의미하며, 알레프는 이 세상에 거하려는 하쉠의 빛을 나타내 줍니다.
하쉠께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자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사실 파라샤트 미슈파팀은 페싹흐(유월절)이전의 4개의 특별한 파라샤들에 대한 일종의 소개 역할을 해줍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슈모트의 책을 마무리 해주며, 하쉠의 슉히나가 이 물리적 세상에서 빛나게 하기 위한 성막을 세우고자 그들의 모든 세부적인 재료들을 모으는 것을 다룹니다.
우리는 앞으로 몇 주 동안 배울 텐데, 미슈파팀의 모든 세부적인 규례는 이 세상, 우리의 겉모습, 우리의 허상적 세상에서 슉히나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어줍니다.
알다시피, 다가오는 아다르 월의 정점인 푸림(부림절)의 기적은 자연계 안에서의 신성한 섭리를 계시해 줍니다.
푸림의 주요 교훈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듯하고 우리가 가장 깊은 가려짐에 잠겨 있을 때나 가장 낮은 곳에서도 하쉠의 임재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영성은 하늘에 있지 않습니다.
하쉠 자신은 파라샤트 미슈파팀의 상세한 작업들로부터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문자 그대로 이 법규들로부터 발견됩니다.
그게 무슨 말일까요?
거룩한 유대 현인들은 토라의 글자가 ‘하쉠의 열망을 위해 이 세상에서 하쉠의 뜻을 입는 옷’이라고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이 계명들은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데, 우리 삶의 모든 면인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누울 때까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족 구성원과 관계를 맺는 방식, 이웃에 대한 책임, 비즈니스를 수행하는 방법 등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매일의 방식에서 함께합니다.
이 모든 것이 토라법에 따라 성취될 때, 우리는 하쉠의 뜻에 따라 우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또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데: 우리의 삶은 그분의 뜻을 나타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삶을 매우 추상적인 것이라 필연적으로 잘못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영적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은 용어상으로 모순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민감한 영적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금욕적인 삶’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원칙에 따라 살기 위해선 세상의 일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육체적 존재의 매일매일 지루한 작은 단조로운 사항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 견해는 반대로 영성의 목표가 존재의 세속성을 넘어서는 것이라 선언할 것입니다.
이번 토라 파라샤는 우리가 특히 일상 생활의 현실을 통해서 올바르게 찾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고안된 하쉠의 신성한 법과 법규들로 우리의 주의를 끕니다.
더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미슈파팀은 하쉠의 법을 준수하는 것이 우리를 영적 성취의 최고 수준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적절한 사업 및 금융 거래, 타인의 재산 관리, 타인에게 입힌 손해배상에 관한 모든 법률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하쉠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 그것이 일상적일지라도, 모든 순간은 문자 그대로 다비드 왕이 트힐림(시편) 16:8에서 ‘제가 항상 제 앞에 하쉠을 두어서’라고 한 것처럼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줍니다.
그리고 더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이로써 우리는 하쉠께서 이 세상에서 인간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셨던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게 됩니다.
진정한 토라적 영성은 이 세상에서 추상적이고 초연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모든 측면으로 옷 입혀지기를 외치고 있습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Comments